감정을 무시하는 정치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애증의 정치클럽 🍂건조 에디터입니다.
유독 큰 사건이 많은 한 주였습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결국 시작됐고, 한미일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와 대법원은 보수 인사 중심으로 재편 중입니다. 모두 ‘대통령의 결단’을 내세우며 추진된 일입니다.
오늘의 에디터노트에서는 최근의 사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건져보려 합니다. 지금의 사회에 대한 대단한 통찰을 내놓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단 스스로를 위로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혼잣말에 가깝겠네요.
지난 2주간의 애정클 콘텐츠
- 폭염과 기후위기 대응 정책 (8/15)
- 광복절 경축사 논란과 특별 사면 (8/17)
- Fridays for Future(미래를 위한 금요일) 테일러 미첼 활동가 인터뷰 (8/18)
- 아프간 특별기여자의 지난 2년 (8/21)
- ‘묻지마 범죄’에 묻고 싶은 것 (8/24)
구독자분들께선 이런 의견을 보내주셨습니다.
- ‘묻지마 범죄’라는 단어보다 ‘이상동기범죄’가 더 적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묻지마’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해당 범죄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 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익명 님)
- 지난 에디터노트가 정말 좋았어요. 독자로 그리고 애정클을 응원하는 시민으로서 애정클이 하필 이렇게 힘든 뉴스가 많은 시기를 만나 고생한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그리고 아무리 애정클에서 비판적으로 핵심만 짚어준다고 해도, 굳이 클릭하기 두려운 뉴스로 가득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잖아요? 그걸 명징한 말로 정리하는 데 들어가는 감정 소모도 엄청날 것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독을 하고 애정클이 계속 글을 발행해나가는 힘은 무엇일까 자주 힘없이 고민하게 되는데, 그 단단한 맘을 나눠줘서 고마웠어요. (익명 님)
8월 9일 발행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미국인들을 읽고 의견을 공유해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 우리나라에 복지가 부족한 이유 중 군사적 지출의 집중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독은 군사적 지출의 비중이 낮았기에 경제 및 복지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하지만 우리나라는 6.25 전쟁의 트라우마가 있기에 더더욱 군사적 지출을 줄이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능성은 낮다지만 미국의 한반도 평화법안이 잘 마무리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석진환 님)
의견을 보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애정클 피드백 창과 홈페이지 댓글로 들어온 의견은 되도록 모두 소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에디터 스토리
일련의 뉴스들을 보다 보면 ‘세계관 붕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번 정권의 행보는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을 급격하게,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변화 앞에서 제가 느끼는 불안은 정치적 이념으로서의 보수에 대한 생각과 무관합니다. 불안의 원인은 나의 감정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몰아치는 정치적 태도입니다.
오염수에 대한 우려는 비이성적인 공포로, 일본과의 관계 개선으로 얻는 실익에 대한 의문은 해묵은 분노로,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은 ‘공산당 기관지’로 낙인찍는 세계가 낯섭니다. 그것이 타당하든 타당하지 않든, 감정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전혀 없다는 게 놀랍습니다.
지금 정치는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언어로 아군과 적군을 판별합니다. 후자의 의견은 무시하고 비웃어도 될 것으로 만듭니다. 분열이 심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바보 취급을 당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를 냅니다. ‘내가 바보였구나’ 하며 반성할 사람은 극소수겠죠. 화를 내든 말든 제 갈 길을 바삐 가는 것이 개인에게는 필요한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치가, 그것도 집권세력이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어떨까요.
바보가 된 사람들은 한없이 무력해질 겁니다. 나의 생각과 감정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어떤 사람은 폭력을 스스로를 증명할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 만연한 소위 ‘묻지마 범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익명의 독자님께서 지적해주셨듯, ‘묻지마 범죄’라는 명명은 범죄 동기에 대한 분석을 가로막습니다. 경찰은 지난해부터 ‘이상동기 범죄’라는 명칭을 대안으로 받아들여 관련 통계 수집에 착수했습니다. (한편 ‘이상동기’라는 표현 역시 범죄자의 특이한 성격적 문제 때문에 범죄가 일어났다는 뜻으로 범죄 원인 분석에 한계가 있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사회적 고립을 이상동기 범죄의 원인으로 꼽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고립이 범죄의 단일한 원인은 아닙니다. 문제는 여러 영역에 얽혀 있습니다. 그중 최근에서야 주목받는 곳이 커뮤니티입니다. 갈 곳 없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그들만의 룰로 ‘정상’과 ‘비정상’을 재정의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보통 일베들의 시대> 저자 김학준에 따르면, ‘일베’와 ‘디시인사이드’에서는 이 과정을 통해 혐오와 냉소를 기반으로 한 세계관이 정립됐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정서가 커뮤니티 내부에서 강화되는 것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커뮤니티를 통제할 제도적 도구가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인정받지 못했다’는 감정이 이미 사회 전반에 넘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의 정치는 이 감정을 적극적으로 무시하는 동시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휘둘리는 무력감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요. 그나마 다행인 건,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공동체가 무너져 개인이 고립된 게 문제라면, 우리가 무언가 함께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 다시 공동체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