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평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
이 글은 2022년 노벨평화상 수상 발표에 대해 2022년 10월 11일에 얼룩소에 그 의미를 해석하며 기고한 글입니다. '코즈모폴리틱스' 시리즈에 앞서 벨빅 클럽장의 관점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샘플로 올려둡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70번째 생일이기도 한 10월 7일, 노벨위원회는 옥중에 있는 벨라루스 활동가 알레스 비알랴스키, 우크라이나의 인권시민단체 시민자유센터(CCL), 러시아의 인권단체 메모리알 등 전쟁 당사자 3국의 인물‧시민단체를 공동수상자로 발표했다. 위원회는 이들이 “자신들의 나라에서 시민사회를 대표하며, 권력을 감시하고 시민들의 근본적인 권리를 보호하고 진작시켜 왔다. 그들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사회의 중요성을 보여줬다”고 시상 취지를 설명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전쟁의 직간접 당사국에서 공동수상자가 나왔다. 더 인상적이게도, 세 국가 모두 자국 수상자들을 껄끄러워한다. 세 국가 정부가 모두 이번 시상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글라스 벨라루스 외무부 대변인, 파데예프 러시아 인권위원회 위원장,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보좌관 등은 모두 노벨위원회의 결정에 비판 목소리를 냈다.
벨라루스의 비알랴스키는 1980년대 소련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을 한 인물이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는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에 맞서 왔다. 2020년 8월, 루카셴코 대통령의 26년 장기집권에 지친 시민들의 민주화 항쟁이 일어났다. 이에 대응하던 루카셴코 정부는 비알랴스키에게 탈세 혐의를 적용해 체포했다. 그는 현재 재판 없이 구금중이다.
우크라이나의 시민자유센터는 우크라이나의 인권침해 및 권력남용 사례 등을 고발하며 우크라이나에 건강한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을 펼쳐왔다. 또한 벨라루스의 시민들과도 연대해 벨라루스 독재에 맞서는 활동도 했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러시아의 전쟁 범죄를 기록하며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점령지역 안에서 실종된 이들에 대한 맵핑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러시아의 메모리알은 소련에서 1989년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인권단체 중 하나다. 이들은 소련 붕괴 당시 벌어진 인권침해를 고발하며 러시아뿐 아니라 구소련 국가들의 인권범죄를 기록하는 활동을 벌여왔다. 러시아 정부의 오랜 탄압 끝에 올해 최종적으로 해산 명령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비합법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메모리알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이 있고 불과 몇 시간 후, 러시아 법원은 메모리알 모스크바 본부에 국가 압류 명령을 부과했다.
국경 안, 국경 밖 달라지는 '평화'의 의미
이번 노벨평화상 수상은 국가적으로만 따지면 적대적 관계로 얽혀있는 이들에게 그 구분을 초월해 활동한 ‘세계 시민’들에게 공동시상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국가가 국경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평화’를 위해 싸우는 모순이 반복될 때, 우리는 가장 보편적인 기준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 시민이란 국가적 정체성에 앞서—또는 초월해—가장 먼저 ‘지구 공동체’ 시민으로 소속과 책임을 느끼는 이들이다. 이들에게는 국경 안이든 밖이든 나와 똑같은 인격과 권리를 가진 동료 시민이 존재할 뿐이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말처럼, ‘어느 한 곳의 불의가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고 믿으며 국경의 구분 없이 어느 곳이든 불의가 일어나는 곳의 시민들과 함께 연대한다.
‘평화’는 분명 누구나 동의하는 인류공동체의 보편적인 가치다. 하지만 이번 노벨평화상 공동수상에 대한 각국의 반응에서도 보듯, 구체적으로 정의하기 시작하면 그 의미가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도 하고, 말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아예 상반된 의미를 갖기도 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쟁 발발 후 여러 차례 ‘평화 협상’을 가졌지만 합의점을 도출해내는데 실패했다. 대한민국과 북한이 ‘평화’를 외쳐 왔어도 여전히 한반도 평화는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다.
20세기에 두 차례 세계 대전을 치른 후, 다시는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말자며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는 세계 인권 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을 통해 인류에게는 국적을 불문하고 최소한 지켜져야 하는 윤리 기준이 합의됐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등하게 태어났으며, 어느 곳에서 살고 있든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는 이 선언은 분명 인류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러 차례 전쟁과 폭력으로 뼈아픈 경험을 한 인류가 깨달은 값진 교훈이기도 하다. 또한 이 전 역사에서 상수였던 전쟁이, 이제는 악하고 피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됐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2월 이코노미스트 기고를 통해 이러한 업적은 “더 나은 선택을 하려는 인류의 노력 덕택에 이뤄진 성과”라고 말하지만, “불행히도, 인간의 선택으로 가능했던 성과는 인간의 선택으로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며 경고한다.
분명 보편적인 인권과 평화의 정의를 상정했지만, 이 개념이 각 국경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의미에 미묘한 차이가 생기며, 때로는 아예 상충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각 국가가 추구하는 각자의 이해관계 속, ‘평화’는 보편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비극적인 충돌을 현재 우리는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벨라루스, 미얀마, 대만, 한반도 등지에서 겪고 있다. 그렇기에 2022년 노벨평화상 공동수상 소식을 접하며, 국경을 뛰어넘은 세계 시민적 관점에서의 보편적인 평화를 곱씹어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국경을 넘어 연대하는 세계 시민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반, 하나의 영상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항복한 러시아 병사들과 그들을 둘러싼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모습이었다.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의 러시아 병사들에게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따뜻한 차와 빵을 대접하며, 이들이 부모님과 통화를 할 수 있게 휴대전화도 빌려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같은 시기, 러시아에서는 53개 도시에서 수천 명의 러시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러시아 인권단체 Ovd-info에 따르면, 2월 24일부터 3월 15일까지 1만 5000명 가량이 러시아 내에서 반전 시위로 구금됐다.
또한 벨라루스 정부는 우방국으로서 러시아를 지지해왔지만, 벨라루스 시민들은 우크라이나 시민들과 연대해 러시아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실제로 영국 채텀하우스가 3월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벨라루스인의 67%가 러시아군이 벨라루스에 주둔해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데 반대의 의사를 나타냈고, 벨라루스 군의 참전에 찬성하는 이들은 3%에 불과했다.
이런 모습 속에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국가에 대한 소속감은 보이지 않는다. 국가 간의 경계가 지워진 그곳에는 서로를 동료로 인식하고, 환대를 나누며, 불의에 대해 함께 연대하는 ‘세계 시민’들이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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