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제 개혁은 거들 뿐?
중대선거구제는 실현 가능한가?
중대선거구제 시행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거대 양당 의원들은 중대선거구제에 동의할 수 있을까? 민주당은 호남, 국민의힘은 영남에서 의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고, 잘 알려진 것처럼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게 되면 양당의 지역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 정치권에서 중대선거구제 도입 필요성이 계속 제기돼왔지만 아직까지 진행되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당장 지난해 10월 민주당 이상민 의원을 중심으로 여야 의원들이 함께 현행 의원 구성을 지역구 127명, 권역별 비례대표 127명, 전국비례대표 46명으로 개편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윤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를 언급하기 전까지는 논의가 진척되지 못했다.
대통령이 시동을 걸고 김진표 국회의장 역시 선거제 개혁을 외치고 있지만 정치권 내의 반응은 엇갈린다. 중대선거구제에 호응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원로 정치인들이나 신예, 소장파 정치인들로, 현재로서는 당 주류가 동의한다고 보긴 어렵다. 여당에서 친윤계로 분류되는 김기현 의원이나 권성동 의원은 ‘의견을 수렴해봐야 한다’며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고, 정진석 의원은 ‘일본에서 중대선거구제는 계파 정치를 강화하는 문제가 있었다’며 반대 의견을 밝혔다. 반면 안철수 의원, 유승민 전 의원은 찬성 의견을 표했다. 야당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선거 제도의 장단점을 고려해야한다”며 “당내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박홍근 원내대표 역시 “선거제도마다 장단점이 있는 것 아니냐”며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선거법 개정, 선거구 획정을 선거 1년 전까지 확정해야 해 논의를 진행할 시간도 길지 않다. 22대 총선은 2024년 4월 10일에 치러지니, 남은 시간은 석 달 정도다. 그 안에 중대선거구제에 대한 합의를 봐야 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시행 방법까지 결정해야 한다. 중대선거구제 실시가 결정돼도 한 선거구에서 몇 명의 후보자를 선출할지, 한 정당의 중복공천을 허용할지와 같은 구체적 문제들에서 또 입장이 갈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장 3월 초 치러지는 국민의힘 전당대회와 검찰의 이재명 대표 조사 등 정국을 잡아먹는 여러 걸림돌들이 많다.
영호남 지역을 남겨두고 우선 수도권을 중심으로 선거구를 개편해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냐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지역주의 타파라는 명분은 퇴색될 수 밖에 없다. 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도 ‘유불리에 따라 선거제도를 고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반대의 뜻을 밝혔다.
꼭 중대선거구제여야만 할까?
다당제 실현을 목표로 제도를 도입한다고 할 때, 반드시 중대선거구제를 실시해야 할 이유는 없다. 지난 총선에서 처음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확대 실시할 수도 있고, 현행 선거제도에서 47명인 비례대표를 확대하는 것도 가능하다. 혹은 지난해 발의됐던 정치개혁법안에서 주장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같은 제도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대안을 제시해볼 수 있다.
하지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난 총선에서 이미 한번 좌절된 제도다. ‘연동형 캡’으로 30석에 한해 제한적으로 실시됐지만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 설치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민주당과 정의당의 동의로 실시됐지만, 여당은 현재도 폐지를 주장하고 있을 정도로 반발이 심했다.
비례대표 의석 자체를 늘려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 가능성을 늘린다면, 방법은 두 가지다. 비례 의석을 늘리는 만큼 지역구 의석수를 줄이거나, 아예 의원 정수 자체를 늘리는 것이다. 전자는 현재 설치된 선거구를 줄여야 한다는 점에서 현직 의원들의 반발을 사기 쉬울 뿐만 아니라, 직접 선출이 아닌 명부식으로 선출하는 비례대표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유권자들이 많다는 문제가 있다. 후자의 경우는 국회의 제 밥그릇 챙기기라는 유권자의 반발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양당 구도를 극복할 방법의 선택지가 많이 남지 않은 가운데 중대선거구제는 단점도 많지만 지금으로서 가장 현실성 있는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기한 안에 다른 절충안이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진표 의장 역시 ‘선거구제 개편안을 각 당에서 제시해달라’면서 다른 제도적 선택지를 열어뒀지만, 앞서서도 말했듯이 논의할 시간이 아주 많지는 않다.
다당제 실현, 선거제도 개편으로 충분할까?
선거구제 개편의 목적이 양당 구도 해소라고 하는데, 과연 다당제를 한국 정치에서 실현하는 게 가능할까?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 안에선 의회 다당제를 이루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정치적 불안정성을 높이기 때문에 양당제 유지가 낫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우리가 다당제 하면 떠올리는 대부분의 국가들(덴마크, 노르웨이, 독일 등)은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다당제와 대통령제는 정말 양립할 수 없는 제도일까?
다당제와 대통령제가 충돌한다는 주장에 반례로 제시되는 나라가 있다. ‘남미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우루과이다. 우루과이 역시 우리나라처럼 1980년대에 군사 독재를 청산하고 대통령 중심제를 수립했지만, 우리와 달리 의회 정치에서 다당제가 자리잡았다.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 의회에서는 소수 정당이 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 다른 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곤 한다. 이런 우루과이 특유의 다당제 + 대통령제 구조를 ‘연정형 대통령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를 통해 우루과이는 매우 안정적인 선거 제도와 정치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1년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에서 우루과이는 10점 만점에 8.86점을 받아 ‘완전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됐다. 같은 지수에서 한국은 8.16점을 받았다. 한국과 정치적 배경에 차이는 있겠지만, 우루과이는 대통령제 하에서 다당제가 이뤄지더라도 안정적 정치 운영이 가능하다는 예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우루과이의 정치 구조를 살펴보자. 우루과이는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실시한다. 대선은 결선투표제를 실시하고, 총선은 상하원 각각에서 비례대표제를 실시한다. 대통령 후보의 지지도가 높다면 굳이 다른 정당과 연대할 필요가 없겠지만, 소수 정당이 결선 투표에서 이기기 위해 다른 정당과 연대해 공동 정부를 구성하는 경우도 있다. 현 대통령인 루이스 라카예 포우는 원내 제2당 소속이지만 야권 연대에 힘입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물론 한국과 우루과이는 다르다. 우루과이의 특징이 ‘연정형 대통령제’라면, 한국의 대통령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대통령 1인에 대한 권력 편중이 심하다. 3월에 치러질 국민의힘 대표 경선에서 ‘윤심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열쇠가 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루과이와 달리 한국의 정치 환경은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이니, 다당제는 끝내 한국에서 실시될 수 없는 제도일까? 그렇지는 않다. 제왕적 대통령제 역시 개혁되야 할 한국 정치의 고질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당제 개혁을 주장해온 정치인들의 행보를 살펴보면, 선거구 개편과 함께 공통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해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일부는 심지어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을 위한 개헌을 주장하기도 했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그랬고, 안철수 의원, 민주당 이상민 의원도 마찬가지다. 총선 선거구 개편의 논의는 단순히 의회 구조 개편에서 그치지 않는다. 선거구 개편 논의에서 그리는 그림에는 현행 대통령제의 개혁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한국에서 중대선거구제를 통한 다당제가 효과적으로 자리잡으려면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권력 집중을 해소하는 정치 개혁(개헌이 될 수도 있지만, 현행 헌법에서의 제도 개선도 가능하다)이 동반돼야 한다. 좋게 말하면 제왕적 대통령제의 개혁을 통해 한국에서도 다당제가 자리잡을 수 있다는 말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다당제의 궁극적 실현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지금의 대통령제에서 다당제가 실시되면 정치적 혼란이 심해질 것이다'라는 말의 전제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대통령제 역시 시대적 요구에 맞게 달라져야 할 제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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