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을 의심하자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애증의 정치클럽 🍂건조 에디터입니다.
인터뷰 콘텐츠 발행 일정이 변경되어, 3주만에 돌아온 에디터노트입니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큰 단어들이 많이 들립니다. 비전, 개혁, 협치, 민주주의… 하나같이 좋은 단어들입니다. 이렇게 의심의 여지 없이 옳다고 여겨지는 개념에서는 일종의 숭고미마저 느껴집니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지요. 정치가 당연하다는 듯 꺼내는 ‘좋은 말’에 삐딱한 시선을 보내기 가장 좋은 시기가 있다면 바로 선거철이 아닐까요. 나를 위해 더 좋은 선택을 하려면 그래야 한다는 뻔한 이유를 대고 싶진 않습니다. 이미 모두가 스스로를 위해 애쓰고 있는 사회라서요.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선 ‘좋은 말’을 의심해야 한다.
제가 이러한 목적으로 보고 있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팬덤정치와 선거법 개정. 꼽고 보니 2023년의 정치 이슈 중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것들이네요. 공교롭게도 지난 3주 간 이 주제에 대해 아주 열심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에디터노트에는 그동안 이어진 저의 상념을 적어봅니다.
지난 3주간의 애정클 콘텐츠
- [쓸모있는 정책플리] 온 마을이 필요한 저출산 대책 (11/21)
- [주간 애증 담소] 🚠 설악산 케이블카가 향하는 곳은(11/23)
- [여의도 밖 정치] 키뮤: 편견을 허무는 유쾌한 콘텐츠 스타트업 (11/24)
- [코즈모폴리틱스] 목숨 걸고 온 난민을 대하는 한국의 태도 (11/29)
- [주간 애증 담소] ⛴️ '역대급' 외국인 노동자 확대, 준비는? (11/30)
- [애증의 인터뷰] 박주리 과천시의원: 정치가 할 일을 하기 위해서, 협치 (12/1)
- [쓸모있는 정책플리] 갈림길에 선 중대재해처벌법 (12/5)
- [주간 애증 담소] 👥 갑자기 장관들이 바뀐 이유 (12/7)
이외에 이런 활동도 있었습니다.
아그레아블 X 애증의 정치클럽 독서모임
‘팬덤 정치를 둘러싼 우리의 대화’
- 1회차 11/19
- 2회차 12/3
구독자분들께선 이런 의견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산안_최종_보스_기재부 (11/14)
- 퀄리티 높은 정리 감사합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조수진 님)
키뮤: 편견을 허무는 유쾌한 콘텐츠 스타트업 (11/24)
- 저희 아들도 발달장애인인데 미술에 관심이 많아요. 좋은 정보를 얻어가네요. (엄자영 님)
박주리 과천시의원: 정치가 할 일을 하기 위해서, 협치 (12/1)
- 지역의 주요 쟁점을 잘 짚어내시는 것 같아서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출퇴근길에 서로 비방하는 현수막을 항상 달아두는 위치를 지나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저렇게 협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요. 환경을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현수막 정치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보지만 우선 정치에 대한 혐오를 줄이는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칭찬하지 않을 이유가 없네요. (천인혁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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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스토리
천인혁 님처럼 저도 박주리 시의원과의 인터뷰를 하며 놀랐습니다. 우선 이렇게 가까이에도 협치의 의미와 필요성을 실천의 영역에서 고민한 사례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협치가 필요하다, 협치가 부족하다는 말은 매일같이 언론에서 쏟아지지만, 그 사례는 늘 해외 또는 역사 속에서나 제시되잖아요.
또한 저 스스로 협치라는 것의 가치를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음을 깨달아 놀랐습니다. 지금의 정치 환경에서 협치가 불가능한 것 또는 순진한 이상론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그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지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되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천을 어렵게 하는 것은, 실재하는 위험 요인보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어쩌면 해선 안 된다고 믿고 있는 마음이 아닐까 싶어졌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풀릴 쉬운 문제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협치의 가치는 무엇인지,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말과 행동은 무엇이고 그로 인해 짊어져야 할 책임과 풀어야 할 갈등은 무엇인지, 궁극적으로 그 선택의 이유를 누구에게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기에 앞서 ‘그런 건 안 통한다’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어려움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에 있겠지요. 그간 제가 들어온 협치라는 ‘좋은 말’에는 이런 고민이 응축된 경우가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주 마무리된 애정클의 첫 독서모임은, 이처럼 ‘좋은 말’에 따라와야 할 질문들을 일단 늘어놓아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정치학자 박상훈 교수의 <혐오하는 민주주의>를 읽고 팬덤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책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 민주주의란 서로 다른 의견의 존재를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한 체제다.
- 팬덤 정치는 다른 의견을 제압의 대상으로 보고, 기존의 정치 규범을 깨뜨리면서 원하는 결과를 빠르게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대안적인 직접 민주주의로 여긴다.
- 원인은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고 팬덤을 통해 권력을 얻고자 한 정치다. 해결책은 상대를 인정하고 정치의 전통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다.
5명의 소규모 모임이었지만 다양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순진한 이상주의라는 비판도 있었고, 민주주의라는 체제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는 고민, 지금의 양극화된 정치가 당연한 풍경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이야기는 공동체의 중요성이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다원주의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상대에 대한 관용이고, 관용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혼자서는 관용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무수한 실패를 겪었을 겁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관용에 실패해도, 품지 못해도 끊어낼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더군요.
공동체는 그런 관계를 만들고, 인식하고, 가꾸는 곳입니다. 팬덤정치, 적대의 민주주의에서 주로 쓰이는 ‘국민의 뜻대로’, ‘당원의 뜻대로’라는 ‘좋은 말’에는 그 과정이 누락되어있습니다. 발화자가 입맛대로 골라낸 주장만이 진리처럼 떠 다니고, 그 말이 공동체 안에 그어버린 선은 말해지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관용을 경험하기 위해선 가장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가치가 필요합니다. 관용의 마지노선으로 기능할 최소한의 합의지반은 필요하니까요. 그 선을 찾아내는 것도 공동체 구성원들의 일이자, 관용의 과정이겠죠. 이때 비어있을지 모를 ‘좋은 말’의 의미를 되물어야 하고, 그것이 진짜 ‘좋은 말’이라면 시스템에 녹여낼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딱 이 단계에 놓여있는 주제가 선거법 개정 같습니다. 현재 정치권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안입니다. 21대 총선에서 바뀐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유지할지, 이전의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돌아갈지가 쟁점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연동형은 소수정당에게 유리하고, 병립형은 국민의힘과 민주당에게 유리합니다. 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연동형을 도입하는데 앞장섰습니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먼저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를 쓰면서, 연동형으로 선거를 치러도 소수정당이 불리해지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힘은 병립형으로 회귀하거나, 위성정당 있는 연동형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다당제를 추구하는 사람, 신당 창당을 계획하는 사람, 소수정당은 ‘위성정당’ 없는 연동형을 주장합니다.
사실 선거법 개정 시한은 한참 전에 지났습니다. 올해 4월까지 마무리하는 것이 계획이었지만 아직도 양당 간 의견이 좁혀지지 못했습니다. 이제 총선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있는데 아직도 선거법이 정해지지 않아 유권자들의 혼란은 커져 가고 있습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2+2 협의체를 만들어 선거법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2+2 협의체란, 합의가 어려운 사안에 있어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양당에서 쓰는 수단입니다. 기록이 남지 않는 비공식 회의에서 소수 인원이 모여 결정을 내리는 겁니다.
모든 정치적 결정이 그러하겠지만, 특히나 선거법 개정은 현실과 이상을 모두 고려하되 그 사이에서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안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어느 정당에게 유리한 판이 짜일 것인가를 고려해야 하고, 이상적으로는 더 좋은 정치를 만들어낼 체제가 무엇일지 생각해야 합니다. 연동형을 지지하든, 병립형을 지지하든 각자의 현실과 이상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밀실에서 선거법을 결정한다면, 유권자는 이를 가려볼 수 없습니다.
결정권자들의 진심 대신 전시되는 ‘좋은 말’은 현실을 가리는 동시에 이상을 왜곡합니다. 좋은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는 환경이란, 그 사이에서 선명하고 진솔한 말이 더 크게 울릴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협치, 팬덤정치, 선거법 개정은 ‘좋은 말’로 포장된 큰 이슈들입니다. 각 이슈에서 어떤 관점이 바람직할지 오늘의 에디터노트를 지팡이 삼아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저와 생각이 다르시더라도, ‘애정클’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관용을 연습한다는 마음으로 살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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