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구원자 미국'만 강조할 때 놓치는 것
다큐멘터리 감독 전후석이 본 '한미동맹'의 서사
전후석(조셉 전)
- UC샌디에이고, 시라큐스 법대 졸업
- 뉴욕주 변호사
- 다큐멘터리 감독
쿠바 혁명의 주역이었던 한인 3세 ‘헤로니모 임’을 다룬 <헤로니모>(2019)
미국 연방 하원 선거에 도전하는 한인 5명을 다룬 <초선>(2022) 제작
올여름, 한미동맹 및 한국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미국 전역에서 한미관계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열렸습니다. 간혹 한반도나 아시아 관련 미국 싱크탱크가 참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행사는 대한민국 정부 주최로 진행되었습니다.
국내 언론에서도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설과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대중에게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인식되듯, 미국 주요 언론이나 여론에서 한미동맹에 대한 심오한 사유를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어쩌면 그것은 차가운 국제관계에서 힘의 불균형이 가져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겠죠.
‘구원자 미국’, 하나의 단조롭고 지배적인 서사
문제는 이런 행사에 등장하는 하나의 지배적 서사에 있습니다. 이 서사에서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항해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번영으로 이끈 ‘구원자’로 묘사되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업적은 유난히 강조됩니다. 이어, 지난 70년간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미국의 안보·경제 지원으로 대한민국은 북한과는 달리 정치 경제는 물론 기술과 문화를 선도하는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는 논조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혈맹국에 대한 존중의 외교적 수사법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격동의 한반도 근대사에서 미국의 다중적 행적을 지나치게 단순화합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어긴 미국
지난 5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개최된 한미동맹 70주년 행사에서 몇몇 미국 학자들은 한미관계에 대한 사유는 70년 전인 1953년부터가 아닌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1882년부터 1950년까지 “또 다른” 70여 년간 한반도에서 미국의 역할을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했습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르면 미국은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침략을 받을 경우 개입해 조선의 안보를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었지만, 미국은 그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1905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에 태프트 육군 장관을 파견해 일명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 통치를,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을 용인했던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처럼 국제관계는 영속적이고 절대적인 가치판단의 영역이 아니며, 역사의 흐름과 지정학적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복잡한 성격을 지녔다고 역설했습니다.
2차대전과 혼돈의 미군정기
한반도에서 미군의 역할을 가늠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역사는 미군정기입니다.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해방 후 3년여간 미군정이 한반도 이남의 유일한 통치기관으로 기능했기 때문입니다. 동아일보의 2004년 광복 5년사 특집 기사에 의하면 한반도 신탁통치를 구상했던 것은 미국이고 그 시기는 1943년부터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영국의 이든 외무장관을 만나 세계 2차대전이 종료된 후 신탁통치 대상 지역으로 한반도를 거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5년 2월, 얄타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소련의 스탈린은 종전 후 한국에 국제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합의했습니다.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 대사는 미군정기 중 벌어진 제주 4.3 사건과 이 시기에 남북과 좌우의 대립이 심화된 것을 상기하며 “일반적으로 한미관계의 출발점을 6.25 전쟁이라고 생각하지만 해방 이후 미군정기 어려운 시기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한미관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외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 주변에 존재했던 일명 ‘기지촌’의 문제도 가볍지 않습니다. 2022년 9월, 대한민국 대법원은 한국 정부가 군사동맹, 외화벌이를 위해 수십년 동안 미군 주둔지 인근에서 ‘기지촌’을 직접 설치·운영한 점을 공식 인정하며 피해자들에게 배상 판결을 내렸습니다. 전쟁 후 한미동맹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된 여러 비인간적 행위들에 무고한 많은 시민들이 피해를 본 것 역시 역사적 사실입니다.
지금의 한국 정치가 생각해야 할 것
세계 어디에 위치한지도 모르는 동방의 작은 나라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적화통일을 막은 미군들의 희생은 분명 숭고한 것입니다. 그렇게 형성된 양국의 혈맹과 자유민주주의 가치 아래 이룬 엄청난 경제적 발전 역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2023년 현재 만약 한미동맹의 근간을 이르는 대서사가 “반공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이념적 틀에 갇혀 있다면, 그것은 퇴보적이고 편파적일 것입니다.
어느 때보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 속, 한미관계는 분명 양국에게 중요한 파트너쉽입니다. 그렇기에 한미관계의 긍정적 가능성은 물론 어두웠던 과거 역시 심도있게 고찰할 수 있는 인내심과 정직함이 요구되는 시기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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