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의 기원, 음모론이 만드는 대안현실
《팝콘폴리틱스》는 문화콘텐츠에 나타나는 정치적 배경을 ‘덕력’ 넘치는 시각으로 파헤쳐보는 콘텐츠입니다.
음모론, 우리 세상의 인식틀
음모론은 2010년대 한국 정치의 세계관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꼼수다>에서 김어준을 비롯한 패널들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다양한 의혹을 제기했다. 이러한 의혹 중 분명 사실로 밝혀진 것도 있었지만 증명할 수 없는 의혹도 있었다. 이후, 김어준은 세월호 다큐멘터리, 2012년 대선 부정 다큐멘터리들을 잇달아 프로듀싱하며 한국 정치를 음모론적 세계관으로 밀어 넣었다. 이에 대해 ‘팩트’의 기준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한 언론인, 법조인 출신 엘리트들은 김어준이 만든 대안현실을 비난했다.
그러한 음모론은 한국 사회의 독자적인 현상이 아니라 현대 정치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라 봐야 한다. 음모론이 본격적으로 대중화하는 기점은 존 F. 케네디 암살을 전후로 한다. 한국에서도 유력 인사의 죽음이 불가피하게 음모론을 불러왔다는 점을 상기할 때, 국민들은 대통령의 죽음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을 터다. 1963년 11월 22일, 링컨 컨티넨탈 차를 타고 댈러스 시내를 퍼레이드하던, 존 F. 케네디는 리 하비 오스왈드가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한다. 케네디가 암살한 장면은 전국에 퍼져 나갔다. 대중 미디어가 보편화된 시기였으니 이런 초대형 사건은 들불처럼 번져 갔을 게다.
케네디의 죽음이 과연 리 하비 오스왈드라는 개인이 벌인 행위에 의한 것이 맞냐는 질문도 이어졌다. 배후에 음모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2010년대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 사고을 바라보는 관점과도 상당 부분 유사하다. 어떤 이들은 천안함 폭침 사건과 세월호 사건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 아닌, 천안함 내부 문제나, 아군의 오폭인데도 정부가 북한의 소행으로 몰아갔다는 주장이다. 세월호에 관해서도 세월호를 고의로 침몰시켰다는 식의 음모론이 불거지기도 했다. 2010년대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음모론들의 기본적 얼개는 케네디 암살에 관련된 음모론과 비슷하다. 사건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충격 받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불신하는 이들이 생긴다. 그들은 사건의 디테일을 꼬치꼬치 캐묻는다.
케네디 암살을 조사하는 워런 위원회는 미국 역사에서 제일 젊은 대통령의 죽음을 리 하비 오스월드 단독 범행으로 결론내린다. 미국인들은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케네디 암살의 배후로 ‘쿠바’에 몰았다. 사악한 공산주의자들이 케네디를 살해했다고 말이다.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케네디 암살을 극우주의자 탓으로 돌렸다. 모두 책임 전가를 했고, 의혹의 불씨를 지폈다. 작은 의심들은 커져서 점차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확신을 붕괴시켰다. 세계 최강국의 최고 지도자가 흉탄에 맞아 사망한 데 이어, 흑인 민권 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됐다. 롤링 스톤스 공연에선 경비원으로 일하던 폭주족 ‘헬스 엔젤스’(지옥의 천사들) 일원이 흑인을 대검으로 살해했다. 문제는 이러한 충격적 테러가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인해 발전된 미디어 상황과 맞물렸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 음모론의 배양지
“텔레비전 매체가 미국 가정의 원동력임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밀폐되고, 시간을 초월하고, 자기완결적이고, 자기지시적인 매체지요. 그건 마치 바로 우리집 거실에서 탄생하고 있는 하나의 신화 같고, 꿈결 같고 전의식(前意識)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무엇 같기도 해요. 잭, 난 거기 푹 빠져 있어요.”
『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유튜브를 음모론을 탄생시키는 배양지라고 간주한다. 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다. 그에 앞서 텔레비전이 음모론이 서식하는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네트워크>(1976)는 텔레비전의 변화된 역할을 새롭게 조명한 작품이다. <돈 룩 업>(2021)과 <빅 쇼트>(2015)로 세계적 명성을 안은 애덤 맥케이가 영화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 작품이기도 하다. <네트워크>는 한때 높은 시청률을 자랑했지만 이제는 인기를 잃은 앵커 빌의 얼굴로 시작한다. 낮은 시청률 때문에 쇼에서 하차하게 된 빌은 우울한 표정으로 친구에게 마지막 방송에서 ‘자살’하겠다는 말로 끝내겠다고 농담했다. 사실 그는 진심이었다.
“저는 다음 방송에서 자살할 것입니다.”
시청률 때문에 자살하겠다는 빌의 방송 중 발언은 언뜻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썩어들어간 매스미디어 자체를 조롱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티비 프로그램이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대기업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어 있다고 폭로한다. 시청자는 여기에 열광한다.
그러자 방송사는 아예 ‘진실만 말하는 앵커’라는 컨셉의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해 빌을 출연시킨다. 이때, 빌은 시청자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송신자 역할을 포기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뉴스 앵커는 대신 시청자들에게 정보를 바라보는 다른 시점을 제공한다. 'TV가 당신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매스미디어는 거짓말을 생산하는 바보상자고, 엘리트들은 미디어를 통해 진실을 숨긴다고 비판하곤 한다. <네트워크>에서는 위 테제를 정반대로 뒤집어 매스미디어가 어떤 것도 숨기지 않도록 한다. 영화는 정신 나간 앵커가 폭로하는 ‘진실’이 오히려 사람들을 움직인다는 점에 집중한다. 텔레비전이라는 우주는 모든 것을 노출 시키지만, 브라운관의 정보는 여전히 파편적이기에 대중은 믿지 못한다. 비슷한 예로 오늘날 한국의 관찰 예능 프로그램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한 스타의 삶을 투명하게 관람한다. 그가 샤워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지만, 우리는 TV에서 보이는 스타의 일상생활이 꾸며져 있다고 으레 생각한다. 즉 어느 때보다 미디어는 투명함을 지향하지만, 그것을 검증할 수 없는 시청자는 외려 그러한 투명함을 기만적이라 간주한다.
〈네트워크〉의 앵커는 ‘TV가 당신들을 속이고 있다’며 ‘정보’가 시청자들을 일정한 경로로 이끌고 있다고 성찰한다. 이 정보의 인공성은 또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다만 사람들은 그 네트워크 속에서 정보가 아니라 감정과 불신, 회의를 공유한다. 이제 시청자들은 브라운관에 비치는 진실을 믿지 않는다. 음모론이 서식할 환경이 완벽히 조성됐다.
음모론 영화에 환호하는 사람들
이처럼 <네트워크>는 미디어 생태계에 일어난 대대적인 전환을 어떤 예술 작품보다도 생생히 보여줬다. 이 영화는 음모론이 이제 모든 대중 문화의 기본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70년대에는 음모론 스릴러가 있을 정도였다. 이 음모론 스릴러 장르의 대표적인 영화들로는 <대부>의 영화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도청>, 앨런 J 파큘라의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 있다. 코폴라의 <도청>*은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혹자에게는 <대부> 시리즈에 비견할만한 코폴라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장면의 오프닝 시퀀스는 음모론의 성격을 보여준다.
<도청>의 주인공은 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공원에서 한 커플의 대화 소리를 녹음해 그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분석하려고 한다. 주인공은 커플의 대화의 한마디를 듣고 부패한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 이 장면은 은유적으로 ‘파편적 사실’을 총체적 진실로 바꾸는 사고관인 음모론과 공명하는 것이다. 철학자 줄리언 바자니에 따르면, 음모론적 사고는 파편적인 사실들로만 완벽한 그물망을 만드는 것이다. <도청>에선 주인공은 자신이 들은 부분적인 대화 내용을 확신한다. 그는 파편적인 진실을 바탕으로 세상의 진실을 규정하려고 한다. 독일인에게 유대인이 아무리 열등한 민족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해도, 그는 믿으려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의 사고방식에는 뿌리깊은 나치라는 세계관이 존재해서다. 이는 과학도, 팩트도 무너트린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라는 책으로 알려진 리처드 호프스태더는 ‘미국 정치의 편집증적 양상’이라는 글을 하퍼스 잡지에 발표해 파문을 일으킨다. 이 글의 핵심 주장은 미국 정치에는 뿌리 깊은 편집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 교외 지역에 사는 중산층은, 미국을 멸망시킬 ‘적화 세력’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었다. 연예계에서도 사회주의자를 색출하는 매카시즘 때문에 많은 영화인들이 자리를 잃었다. 케이퍼 장르*의 시초격인 <리피피>를 만든 줄스 다신은 유럽으로 떠났다. 봉준호 영화감독이 애정을 고백한 느와르 영화 <악의 손길>을 만든 폴론스키는 매카시즘 때문에 경력이 단절됐다. <하인>을 만든 조셉 로지도 영국과 유럽을 떠돌며 영화를 만들었다. 호프스태더는 매카시즘과 같은 편집증의 주요한 특징으로, 음모론적 사고를 ‘세계 전체’를 움직이는 운명으로 바라본다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유대인이 세계 금융의 배후에, 빨갱이들이 할리우드 배후에 있다고 말이다.
*케이퍼 장르: 범죄 전문가들이 힘을 모아 <오션스 일레븐>처럼 은행이나 보석점 같은 곳을 터는 장르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는 호프스태더가 말한 편집증의 성격을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에선 음모론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장군 스털링 헤이든 때문에 핵전쟁이 일어난다. 그는 소련의 스파이들이 미국인이 마시는 물에 불소를 탔고, 불소는 미국인들을 세뇌한다고 말한다. 그는 세계 전부를 소련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0세기의 음모론은 파편적인 사실을 세계 전체와 연관시켰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방법은 시간과 공간에 맞물리는 양상이다. 예컨대 우리는 이런 음모론도 상상해볼 수 있다. 상하수도 시설이 위치한 곳에서 북한의 스파이가 잡혔다. 그는 국가보안법 혐의로 잡혀갔다. 상하수도 시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가 간 이후부터 녹물이 발견된다. 음모론자들은 이러한 패턴만을 가지고 거대한 세계관을 만든다.
이는 시민이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뒤바꿨다. 진보적인 식자들은 음모론적 사고를 가진 멍청한 시민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오염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디어 생태계가 존재하는 한, 음모론적 사고는 언제 어디서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 대선에 당선된 배경에는, 다종다양한 우파가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컬트적일 정도로 황당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QAnon(큐아넌)의 딥스테이트 음모론은 미국 정부를 조종하는 그림자 세력이 있으며, 여기에는 민주당이나 진보 인사들이 다수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딥스테이트’ 음모론은 우리가 일전에 다룬 음모론의 운명론적 사고를 극대화했을 뿐이다. 유대인부터 프리메이슨, 정치적 올바름을 말하는 리버럴들을 구멍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한 그물망으로 묶어낸 ‘딥스테이트’ 음모론에는 20세기에 등장한 모든 음모론이 전부 등장한다.
QAnon과 딥스테이트 음모론의 파급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이러한 음모론은 유튜브의 거짓 정보에 의해 이뤄지는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음모론에 앞서, 정보만큼 그에 대한 불신도 공유하는 미디어 생태계가 선재한다는 점이다. 즉 <네트워크>에서 보았듯, 텔레비전과 미디어는 진실을 단순히 감추거나 왜곡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유튜브는 우리가 정보를 대하는 방식 자체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 오늘날의 미디어 생태계는 모든 정보를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대안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논리는 대중 민주주의의 핵심을 찌른다. 당대엔 모든 정보에 누구나 접속할 수 있다. 모두가 각자의 해석을 낼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의 표로 승리하는 대중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왜곡된 사실, 가쉽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미디어는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지운다. 이보다 음모론이 난립하기 좋은 상황이 어딨을까? 음모론은 현대 정치의 기본값이 되었다.
글: 강덕구 작가. 『밀레니얼의 마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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