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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석: 온전한 이중성, 디아스포라

출신 국가, 서류상의 국적으로만 분류하면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요.

애정클
애정클
- 18분 걸림 -

사막의 풍경을 표현할 때 빠지지 않는, 바람에 굴러다니는 먼지 같은 물체가 있지요. 이것의 정체는 회전초라는 식물입니다. 말 그대로 사막을 데굴데굴 구르다 비가 오면 빠르게 뿌리를 내려 성장하고, 물이 부족하면 바싹 말라 뿌리를 끊고 다시 굴러다닙니다.

회전초의 뿌리 없는 삶은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엄청난 생존 능력을 자랑합니다. 생각해 보면 인류의 역사도 뿌리를 내리고 사는 식물보다 회전초에 가깝습니다. 인류는 늘 더 나은 삶을 찾아 이동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하지만 한 번 자리를 잡고 만들어진 세계는 이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뿌리를 끊고, 다시 찾고, 또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삶의 면면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몰아내거나, 방관하거나, 착취합니다.

전후석 감독은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디아스포라입니다. 그의 영화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다채로운 삶을 담아냅니다. 11월 8일, 전후석 감독을 온라인으로 만나 디아스포라와 정치를 화두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전후석(조셉 전)

  • UC샌디에이고, 시라큐스 법대 졸업
  • 뉴욕주 변호사
  • 다큐멘터리 감독

쿠바 혁명의 주역이었던 한인 3세 ‘헤로니모 임’을 다룬 <헤로니모>(2019)

미국 연방 하원 선거에 도전하는 한인 5명을 다룬 <초선>(2022) 제작

국경을 넘어선 정체성

감독님의 삶에서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는 어떻게 떠올랐나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요. 저는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이중 국적자였는데, 미국에 살기로 하면서 한국 국적을 포기했을 때 유승준 병역기피 사건*이 터졌어요. 그 사건이 전 국민적인 질타를 받는 걸 보면서 저도 이입이 됐죠. 미국에 가면 나는 어떤 한인으로 살아야 하는지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재미 한인 정체성을 찾았다고 생각했을 때 세계 여러 나라를 갈 때마다 재외동포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서 디아스포라라는 정체성까지 생각하게 됐어요.

*유승준 병역기피 사건: 유승준이 2002년 미국 시민권 취득으로 병역을 기피해 한국 입국이 금지된 것

디아스포라라는 정체성은 어떤 것인가요?

디아스포라는 기본적으로는 모국 밖에 사는 사람들이에요. 지리적인 개념일 수 있지만 인문학적, 철학적 확장을 통해 어떤 '초월적', '경계적', '포용적' 정체성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더불어, 디아스포라라는 화두가 디아스포라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에요. 모국과 그 밖에 사는 사람들의 유기적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킬지가 중요해요.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정체성은 ‘한국인 이민자’와 다른 걸까요?

추상적인 개념이라 정확히 구분하긴 어렵지만, 저는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이민 1세대는 미국 사회에 융합하지 못하고 여전히 모국의 관습과 문화에 젖어 있는 모습이죠. 반면 디아스포라는 모국 밖에 살아가는 동시에 현지 사회의 온전한 일원인 사람이에요.그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코리안도, 아메리칸도 아닌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기능하지요.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온전한 이중성, 더 나아가서는 ‘초월성’이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이고, 그런 새로운 정체성을 탄생시키는 일이 디아스포라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는 것에는 LA 폭동이라는 사건이 중요하게 작용했어요. 당시 저는 한국에 있었는데, 대학에 가서 그 사건의 상징성을 배웠죠. 모든 디아스포라적 공동체들은 이민자에서 그 나라의 소수 민족이 되는 역사적 사건을 겪었다고 봐요. 고려인 같은 경우는 스탈린에 의한 이주로 정체성이 새롭게 탄생했고, 재일교포는 (여러 다른 역사적 사건들도 존재하지만) 관동 대지진으로 조선인들이 학살당하면서 ‘재일교포’로서의 소속감을 가지게 됐겠죠. 조선족은 문화 대혁명을 통해서 그렇게 됐고요. 재미교포의 경우는 LA 폭동이 큰 역할을 했어요.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써의 정체성 고민을 담은 영화, ‘초선'. ©커넥트픽쳐스

국적을 따지면 감독님은 미국인인데, 그 표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정체성이 있는 것이죠. 국적이라는 기준은 디아스포라적 관점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나요?

서류상으로는 제가 미국 시민이지만, 미국인이라는 타이틀도 굉장히 추상적이에요. 예를 들면 오바마가 정의하던 미국인의 표상과 트럼프가 정의하는 미국인의 표상도 매우 다르죠. 제가 갖고 있는 복합적인 여러 정체성이 있는데, 그중 미국인으로만 지칭하자면 당연히 하자가 있어요.

디아스포라 일원들을 출신 국가, 서류상의 국적으로만 분류하면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요. 예를 들어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인식하는 어떤 조선족을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혹은 공동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서예요. 근데 그 맥락을 이해하면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우리가 이렇게 편협한 생각을 갖는 것엔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그중 하나는 한반도 지리 안에 국한된 역사관이에요.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적 역사관을 갖고 있을 수 있어요. 모국이 2500년 동안 없었기 때문에, 세계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든지 유대인 역사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는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을 수 있어요. 한편 우리나라는 한반도 안에서 있었던 역사만 우리 것으로 주장하고 그 외의 역사는 다른 나라의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한반도 밖에서 살아온 사람은 그 나라 사람일 거라는 편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어요.

줌 인터뷰를 진행 중인 전후석 감독 ⓒ애증의 정치클럽

한국의 경우 디아스포라들이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역사적 맥락, 즉, 분단이라는 정치적 상황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감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꼭 통일이 아니더라도 평화를 목표로 할 때 디아스포라가 좋은 매개체, 상상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디아스포라는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법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으로 터득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잖아요.

디아스포라처럼 생각하기

그렇다면 디아스포라적 사유란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요?

제가 자주 인용하는 강남순 교수님은 ‘환대의 정신’이라고 이야기해요. 디아스포라는 소수자잖아요. 소수자가 되는 경험을 통해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소수자들을 인지하는 능력을 내재하게 돼요. 그런 보편적 연대 정신을 말하죠. 하지만 디아스포라라고 해서 꼭 디아스포라적 사유를 갖고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럴 가능성이 높기는 하죠.

모국에서 자고 나란 사람에게도 디아스포라적 사유는 필요해요. 정말 필요한 훈련인데, 다양한 민족들의 공존을 고민했던 미국, 프랑스 등의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현저히 부족해요. 문제는 한국이 이런 교육을 받지 않고 살아도 괜찮은 나라가 아니란 거죠. 2500만명의 북한 사람들이 있고, 코리안 드림을 위해 한국에 오는 외국인이 점점 많아지고 있잖아요. 공존이란 화두는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디아스포라적 사유를 기반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행해온 일을 보면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렇죠. 아이러니한 일이에요. 하지만 항변을 하자면, 미국에선 유대인 집단에서 젊은 세대일수록 오히려 팔레스타인 지지자 비중이 높아지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어요. 유대교엔 정통파, 보수파, 개혁파가 있는데 미국 유대인들은 상당수가 개혁파거든요. 이들은 절대 다수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지지해요. 흑인들이 민권 운동을 벌일 때도 많은 유대인이 참여했어요. 반유대주의를 겪으며 다른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한 운동에 늘 참여해 온 역사적 흐름이 있었어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다음날인 10월 8일,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유대인' 집회에 나선 미국 내 유대인들. ©원본 SNS / 인용: The Times of Israel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이 편협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로 발현된 부분은 분명 있어요.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은 그보다 인본주의적, 보편주의적으로 거듭나야 해요.

지금, 한국의 디아스포라

한국에선 재외동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유용한 도구 정도로 볼 때가 많아 보여요. 저출산을 해결하기 위해 재외동포의 귀향을 촉구한다든지, 재능 있는 재외동포를 통해 기술 선도국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적지 않게 있거든요. 그런데 그분들은 꼭 비하적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 그냥 그런 개념 자체가 발달되어 있지 않는 것 같아요. 물론 그런 효과가 있을 순 있지만, 발상 자체가 국가적 필요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요. 재외동포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깊은 고민이 있었을까 회의적일 때도 있어요.

재외동포의 다양성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도 한데요.

출신 국가의 위상에 따라서 편견이 작용하는 것 같아요. 고려인 4세 친구와 얘기한 적이 있는데요. 이 친구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서 카자흐스탄에서 자랐고, 지금은 독일에서 박사로 활동하고 있어요. 그러다 대한민국 정부가 주도하는 해외 유학생 대상 캠프에 갔대요. 재외동포 학자들을 초대해서 한국 투어를 시켜주는 거죠.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것도 보고, 생각하지도 못한 환대를 받아서 너무 좋았는데, 독일로 돌아가기 전에 시골에 가서 외삼촌을 만났대요. 그런데 외삼촌은 엄청난 차별과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독일에서 박사를 하는 재외동포로서 본인이 받은 대우와 일개 우즈베키스탄 출신 노동자인 외삼촌의 취급에 큰 괴리감을 느꼈대요. 우리나라에 그런 양면성은 분명 존재해요.

최근 인요한 박사가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으로 발탁돼 화제인데요. 외국계 한국인으로서 인요한 박사가 정치 활동에 임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요한 박사의 정치적 색깔과 무관하게 혁신위원장이 된 것은 긍정적으로 봤어요. 국민의힘이 세련됐다는 생각도 했고요. 최초의 귀화인 국회의원인 이자스민도 국민의힘에서 뽑았잖아요. 물론 정치공학적 계산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인종적 다양성을 내세우려는 시도 자체는 새롭다고 봤죠.

최근 절 놀라게 한 일은 이준석 전 대표가 인요한 박사를 영어로 응대한 사건이에요. 굉장히 모욕적으로 들렸고, 명백한 인종차별적 태도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제대로 지적하는 언론이 없다는 것에 더 놀랐어요. 감수성 자체가 없는 거예요. 미국에서 백인 의원이 공식 석상에서 한국계 의원에게 어설픈 한국어로 “당신은 우리의 일원이 아니다" 라는 말투로 더듬더듬 이야기했다고  생각해봐요. 이준석은 중의적으로 표현한 거라고 얘기하던데, 그런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미국에서는 금기고, 질타받을 일이에요. 미국에 사는 코리안 아메리칸 입장에서는 감정 이입이 되는 일이에요.

지난 4일 오후, 자신의 토크콘서트를 찾아온 인요한 혁신위원장에게 이준석 전 대표는 영어를 쓰며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연합뉴스

올해 가장 뜨거웠던 이민 정책은 조정훈 의원의 외국인 가사도우미 최저시급 면제였어요.

다문화, 다인종 사회를 경험했을 사람이 그런 해결책을 낸다는 것에 근본적인 회의감을 느꼈어요. 조정훈 의원이 어떤 포용적, 환대적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에 대한 심도있는 고민을 해봤을지 궁금했죠. 국제 기구에서 세계시민적 엘리트들과 함께 저개발 국가를 도와주는, 시혜적인 입장에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정치인으로서 그런 인종차별적 발상을 한 건 정말 실망스러웠죠.

현 정부의 재외동포 정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최근 재외동포청이 설립되기도 했는데요.

재외동포청의 구체적 활동을 충분히 보지 못해서 아직 그 부분에 대한 평가는 어려운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재외동포재단과 긴밀하게 일해봤기 때문에,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재외동포 정책이 잘 되어 있다고 말할 순 있어요. 재외동포의 한국인 정체성 함양, 모국 방문 등에 많은 금액을 지원하고 프로그램도 세세하게 잘 돼 있어요. 그에 비해 대중들의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은 현저히 떨어져요. 대중 인식 개선에 더 많은 자원이 투입되면 좋겠다고 예전부터 바라왔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정부의 재외동포 지원을 누리는 사람은 많은 경우  그 지원이 필요 없는 이민 1세대에요. 한국을 이미 잘 아는 사람들이 지원을 통해서 한국을 재방문한다거나, 그런 식의 폐해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재외동포의 미래, 디아스포라의 미래는 한국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2세대, 3세대에게 있어요. 이들에게 자원이 투입되는 게 맞죠. 일부이긴 하지만 해외에서 권력을 좇는 기성세대가 재외동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원을 받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현 사업들은 국가주의적 성격이 강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많죠. 저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재외동포에게 알맞은 지원은 임파워먼트(empowerment)거든요. 한민족이라는 소수 민족으로서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느끼게 하는 거예요. 모국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거기에 연결됐다는 느낌을 통해서 자아를 단단하게 하는 거죠. 그 수준에서 멈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는 그들의 개별적 결정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균형 맞추기가 쉽진 않아요. 민족주의의 선을 구분하기가 어렵고요. 말씀하셨듯 국가적 차원에서 이들을 귀속하려 하거나 한국을 빛내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부분도 있고요. 이스라엘의 사례도 그렇고, 오늘 다룬 현안들에선 우리가 세우려고 하는 게 보편성인지, 편협한 국가성인지 재어 볼 때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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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의 정치클럽 팀이 함께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