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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예 웨스트는 왜 나치를 옹호했나?

애정클
애정클
- 18분 걸림 -

《팝콘폴리틱스》는 문화콘텐츠에 나타나는 정치적 배경을 ‘덕력’ 넘치는 시각으로 파헤쳐보는 콘텐츠입니다.

칸예 웨스트, 히틀러를 찬양하다?

검은색 복면으로 얼굴을 꽁꽁 싸맨 칸예 웨스트는 “나는 아돌프 히틀러가 좋다"고 말했고, 인터넷은 또 한 번 폭발했다. 게다가 칸예는 이전에 반유대주의 발언으로 아디다스와 계약이 해지된 바 있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을 비판하던 칸예가 자신을 비판하던 피 디디(노토리우스 BIG 추모곡 “I’ll be missing you”로 유명한 퍼프 대디)를 비난하며 “당신에게 나를 저격하라고 한 유대인들에게 그 누구도 나를 위협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을 본보기 삼아 보여줄 것”이라는 발언을 게시했다.

래퍼 칸예 웨스트

물론 칸예 웨스트의 기행(?)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흑인 중 한 명이었다. 자신을 비판하던 인터넷 매체 TMZ에 나와 기자들과 공개적인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나치 옹호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대안우파는 그에 환호했고, 기존의 팬층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아디다스와 갭과의 계약해지로 칸예는 사면초가 상황이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있다.

칸예는 복면을 쓰고 TV 쇼에 출연해 '아돌프 히틀러가 좋다'고 말했다 ⓒINFOWARS

예술가들의 극우 전향은 반복된다

그러나 칸예 웨스트의 극우 전향을 단순히 퍼포먼스라고 보기에는, 극우로 전향한 예술가는 많다. 많은 예술가들이 커리어의 내리막길로 접어들 때 정치에 기대곤 한다. 말년의 해롤드 핀터는 더 왼쪽으로 옮겨갔고, 최근의 데이비드 마멧(<위험한 게임>이라는 멋진 영화을 만들었고, <언터쳐블>의 시나리오 등을 쓴 뛰어난 극작가)은 트럼프를 지지했다. 아마 아주 극적인 케이스 중 하나는, 1976년 <스테이션 투 스테이션(Station to Staiton)>을 낸 직후의 데이비드 보위일 터다. 보위는 한 인터뷰에서 나치를 옹호하고, 전후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독재정치를 찬양했다. 다양한 페르소나(부캐)를 평생 사용했던 보위가 당시 사용했던 페르소나는 “화이트 듀크”였다. NME 인터뷰에서 보위는 정확히 “극우 세력이 나타나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당시 많은 증언들을 들어보면, 보위가 코카인을 너무 많이 했고, 또 보위 자신도 이때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술회했다. 이후, 보위는 나치 발언은 후회한다고 밝혔다. <스테이션 투 스테이션>은 보위의 흑역사인 동시에 그의 걸작이다. <스테이션 투 스테이션>에는 베를린 3부작의 원재료가 된 크라우트록, 그가 <Young Americans>에서 선보였던 살균된 훵크(funk)가 뒤섞여 있다. 저 만남에는 묘하게 나치와 흑마술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트랙. 다소 음울한 내리깐 보컬, 크라우트록처럼 반복적이다가, 급작스레 훵키하게 변하는 트랜지션. 이 음악은 가장 위대한 대중음악 중 하나다.

그렇다고 보위의 나치 발언이 용서받는 것은 아니겠지만, <스테이션 투 스테이션>은 보위의 탈출구였다. 어떤 예술가들은 정치적 극단주의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뿐 아니라, 그것을 창의력의 원천처럼 사용했다.

전후 유럽이라는 시공간

나치는 이념이라기보다는 이미지였다. 나치는 전당대회이자, 건축물, 영화였다. 레니 리펜슈탈과 프리츠 랑은 제3제국을 위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사상보다도 오래 살아남은 나치의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나치 독일을 멸망시킨 미국에서 부활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나치는 우스꽝스러운 악당으로 표현되었다. 1969년 멜 브룩스(그는 유대인이다)의 <프로듀서스>는 히틀러를 패러디한 뮤지컬 장면을 넣어 화제를 낳기도 했다. 끈 떨어진 프로듀서들이 히틀러를 다룬 뮤지컬로 재기를 꿈꾼다. 흥미로운 점은 브룩스가 히틀러를 게이 캐릭터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추후 나치와 게이 서브컬쳐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확실히 선구적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며 나치는 초월적인 악행을 벌인 악마에서, 가죽옷을 입고 폭스바겐을 만든 ‘악당’으로 변해갔다. 전후 유럽에도 나치를 다룬 영화들이 등장했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를 다룬 <카포>(1960)는 프랑스에서 제작되어 영화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트래블링 숏’(*트랙을 두고 카메라가 움직이는 촬영기법)이 피해자의 죽음을 노골적으로 전면화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카포>에 대해 비평가들은 철조망을 부여잡고 죽어가는 피해자의 모습을 훑는 카메라의 시선에 일종의 음란함이 깃들어있다고 비판했다. 예술가들이 나치를 들먹이며 대중의 주목을 받으려는 배경 뒤에는 나치가 태초부터 이미지와 스펙터클에 깊이 연루된 미적 정치라는 점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이것은 전쟁을 겪었던 세대에 대한 전후 세대의 도발이기도 했다. 예컨대 독일의 68세대는 전쟁 범죄의 책임을 떠안은 기성세대와 달랐다. 그들은 나치 독일에 거리를 둘 수 있었고, 그들을 폭로할 수 있었다. 뉴 저먼 시네마의 거장 한스 위르겐-지버베르그 는 8시간에 걸치는 러닝타임의 <히틀러, 독일 영화>를 1977년에 발표한다. 이 영화는 독일 낭만주의 미학, 오페라 등을 나치즘 분석에 접목해 히틀러를 탄생시킨 독일을 훨씬 일관적인 세계로 다뤘다. 지버베르그는 인터뷰에서 히틀러가 독일인의 꿈을 완수한 상징적 존재라고 말한다.

전후 책임 문제는 또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바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시민들이 받은 피해다. 영국군이 독일 도시에 무차별 폭격을 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망각되어 왔다. <공중전과 문학>이라는 책에서 W.G 제발트는 연합군이 저지른 폭격을 우리가 응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하는 듯 보인다. 나치는 가해자였지만, 독일 시민은 가해자이기만 했는가. 우리가 폐허가 된 도시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전쟁 책임의 복잡한 공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나치를 옹호하지 않고도, 독일의 피해를 바라볼 수 있다고 말이다.

캠프 미학, 나치의 서브컬처화

전후 유럽에서 불거진 나치 청산 문제는 (동양인의 입장에서 흥미롭게도) 하나의 서브컬쳐가 되어 버렸다. 먼저 나치는 섹스 판타지로 활용됐다. 영국의 전설적인 포스트 펑크(post-punk) 밴드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의 밴드명은 유대인 소설가가 쓴 유대인 강제 수용소 소재의 소설에서 따왔다. 처음에 조이 디비전은 바르샤바라는 이름을 썼다. <Electric Circus> 앨범 도입부에서 커티스는 이런 상황에 대해 조이 디비전의 보컬 이언 커티스는 “루돌프 헤스를 모두 잊었나?”라고 중얼거린다. 커티스의 나치 도발은, 나치가 갖고 있던 악마적 아우라를 예술작품에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펑크 이후의 펑크, 즉 포스트 펑크가 재현하는 음울한 나치을 다뤘다면, 캠프 미학은 섹시한 나치를 다룬다. 동성애자 영화감독 케네스 앵거의 <스콜피오 라이징>에는 폭주족이 등장한다. 폭주족은 크롬이 도금된 고리를 착용하고, 가죽 소재의 검은색 제목을 입고 있다. <스콜피오 라이징>은 조악하고 조잡한 장식을 스타일의 원천으로 삼은, 캠프 미학의 일부 사례였다.

캠프 : 저속하고 천박한 미적 스타일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을 의미한다. 주로 동성애자 문화에서 이성애적 규범을 뒤집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드랙퀸이 등장하는 영화 <핑크 플라멩고>가 있다.
캠프 요소가 돋보이는 '스콜피오 라이징'의 한 장면. 나치를 연상시키는 모자를 쓴 남성이 등장한다 ⓒ스콜피오 라이징 스틸컷

<엑소시스트>로 유명한 영화감독 윌리엄 프리드킨은 1980년 문제작 <크루징>을 낸다. 이 영화는 동성애자만을 살해하는 연쇄 살인범을 찾으려는 이성애자 경찰이 동성애자로 언더 커버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인 알파치노가 들어가는 클럽 안은, 온통 가죽옷과 나치 제복이 있다. 동성애자들의 나치 애호는, 남성성을 과도히 추구하는 나치의 기이한 변태성에서 비롯됐다. 국가를 위해 남성 동료들과 함께 싸워 나가는 이들을 맺어주는, 피의 맹세는 전후에 유머 소재로 활용됐던 것이다. 근육질 남성이 몸에 꽉 끼는 제복을 입고,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은 성적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 충분했다.

파시즘에 대한 매혹은, 나치 군인뿐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낸 공간인 ‘수용소’를 소재로 삼는 영화도 있다. 릴리아니 카바니가 만든 <나이트 포터>(1974) 같은 악랄하고 기이한 새도매저키즘적 관계를 다루는 영화도 있다. <나이트 포터>의 줄거리는 충격적이다. 나치 수용소에서 성착취를 당한 여성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배달부로 지내는 전직 나치 장교와 다시 사랑에 빠진다. 2011년, 깐느 영화제 기자회견장에서 “나는 히틀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해 큰 논란을 빚었던 라스 폰 트리에는 <나이트 포터>의 광팬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나치 제복을 입고 다녔다고 술회한다. 그것이 사회민주주의를 믿고 있는 부모 세대에 대한 반항이었다고 말한다.

폰 트리에는 한 영화제에서 <나이트 포터>의 감독인 릴리아나 카바니를 만나고, 그녀에게 자신이 이 영화의 팬이라고 고백하지만, 카바니는 쌀쌀맞게 말한다. "돈 준다고 만들었던 쓰레기"라는 대답만 듣는다. 영화감독 본인도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지우고 싶었던 <나이트 포터>는 라스 폰 트리에라는 문제적 영화감독을 만들었다. 폰 트리에의 단편영화 <Image Relief>는 나치 장교의 보이스 오버로 영화를 시작한다. 그의 최근작 <살인마 잭의 집>에선 공공연히 알페르트 슈페어의 폐허 미학을 언급한다. 슈페어의 폐허 미학이란 만 년 동안 유지될 제3제국(나치)를 상정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줬던 로마의 건축물처럼 나치의 건축물 역시 미래에 폐허가 될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폰 트리에의 생각은, 나치의 미학을 재활용하겠다는 데 있다. 나치의 일부 이미지를 서브컬처적으로 활용하건, 나치의 미학을 받아들이건, 서구의 대중문화에는 이미 나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됐다.

칸예 웨스트의 나치 옹호는 이처럼 서구의 대중문화에 뿌리 깊이 선재해 있다. 나치를 옹호하고, 그들의 미학을 활용해서 관객에게 충격을 주려는 예술가의 시도는 어쩌면, 대중들의 무의식에서 나치와 같은 정치적 악몽을 내쫓을 수 없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도발의 의미

나치만큼 섹시의 아이콘으로 활용되진 않지만, 극우의 아이콘으로 사용된 캐릭터가 있다. 한국에도 알려진 ‘페페’다. 만화가 맷 퓨리의 코믹스에서 처음 등장한 이 캐릭터는 점차 대안 우파의 상징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유의 큰 눈과 큰 입으로 무언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개구리가 대안 우파의 상징이 되다니! <밈 전쟁: 개구리 페페 구하기>는 페페가 대안 우파의 담론장에서 유통되는 모습을 섬세하게 그리는 다큐멘터리다. 밈은 문화 유전자를 뜻하는 도킨스의 신조어였다. 오늘날에 ‘밈’은 이제 정치적 아젠다를 옮기는 짤막한 농담과 이미지를 뜻하며, 페페는 그 상징과도 같다.

한국 인터넷에서 '불쌍한 개구리'로 알려진 '페페'는 점차 극우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최근 악명을 떨친 밈 중 하나는 ”호페언 스네이크(Hoppean Snake)”다. Hoppean은 한국에도 번역된 바 있는 자유지상주의 경제학자 한스 헤르만 호페를 의미한다.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와 자본주의를 결합한 호페의 사상은,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을 공격하는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대안우파들은 민주주의 정신을 부정하는 호페를 ‘캐릭터화’한 것이다. 거기에 또 하나의 요소가 따라온다. 영미에서 발흥한 신자유주의를 어느 선진국가보다도 잘 받아들인 국가는 피노체트가 독재하고 있는 칠레였다. 피노체트는 정당한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아옌데를 내쫓고, 군부독재를 수립했다. 군부독재와 신자유주의가 결합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신군부 독재와도 유사한 느낌을 준다.

서구 극우의 또 다른 밈인 '호페언 스네이크'.

“호페언 스네이크”는 트럼프주의자를 비롯해 미국의 다양한 대안 우파 사이에서 밈처럼 통용됐다. 상기한 이미지 뒤에 보이는 헬리콥터에 주목해보자. 피노체트의 군부는 반정부 요인들을 헬리콥터에 태워 태평양에 떨어트려 살해했다. 대안 우파는 이것을 유머 코드로 활용했다. 이것은 마치 일베를 생각나게 한다. 일베 이용자들이 ‘전두환’를 ‘전땅크’로 부르고, 민주화를 자신들의 은어처럼 사용하는 것과 “호페언 스네이크”는 닮아 있다. 밈정치는 스노우볼처럼 굴러가면서 이용자들을 급속도로 모은다. 밈은 사고의 정지를 일으킨다. 단숨에 이용자들은 “호페언 스네이크”를 보고 낄낄거린다.

밈 정치와 서브컬쳐로서 ‘나치즘’은 정치를 얄팍한 이미지로 만든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나치의 전당대회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향연, 후고 보스가 만든 아름다운 제복, 알베르트 슈페어가 디자인한 건축물 등은 조잡하기 그지없는 나치의 정치철학을 효과적으로 포장한다. 여기서 정치는 ‘매혹’의 도구가 된다. 사람을 웃기는 밈 정치도 마찬가지다. 2020년 대선에서 칸예 웨스트는 생일이당(Birthday Party)이란 정당을 창당해 출마할 것이라 주장했다. 유대인들에게 히틀러를 용서하라고 말한 칸예의 본심은 무엇일까? 그는 점차, 예술에서 종교와 정치로 기울고 있다. 그의 선택이 보위나 폰 트리에처럼 예술적 도발에 그치기를 바랄 뿐이다.

데이빗 보위는 나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후, 베를린 3부작으로 커리어의 절정을 맞이한다. 칸예도 어처구니 없는 반유대주의를 반성하고, 이 시기를 원동력 삼아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글: 강덕구 작가. <밀레니얼의 마음>(2022)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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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의 정치클럽 팀이 함께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