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선거구제, 기초부터 심화까지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투표할 마음이 안 들 때가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우리 지역구에선 당연히 특정 정당이 이길 거라서,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은 당선될 것 같지 않아서,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들은 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등등. 투표소까지 가서 스트레스를 받을 바엔 아예 투표를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투표해봤자 바뀌지 않는다’는 무력감은 낮은 투표율로 이어졌다.
위와 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목해볼 만한 이슈가 있다. 올해 초 윤석열 대통령이 띄운 중대선거구제 도입이다. 윤 대통령은 올해 신년 인터뷰에서 정치 양극화 해결을 위해 다양한 국민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선거제가 필요하다며 중대선거구제를 거론했다. 중대선거구제가 뭐길래 양극화의 해결사로 제시된 걸까? 중대선거구제 도입은 ‘투표하면 바뀌는’ 선거로 이어질 수 있을까? 애정클에서 차근차근 살펴보자.
중대선거구제, 원리는 이렇습니다
선거구제는 선거구를 결정하는 제도다. 선거구란 선거를 실시하는 단위다. 예를 들어 대통령 선거는 전국이라는 하나의 선거구에서 실시된다. 반면 지역별로 진행되는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는 여러 개의 선거구를 두고 있다.
선거구제는 각 선거구에서 선출하는 대표자의 수에 따라 소, 중, 대로 나뉜다. 소선거구제는 선거구 당 1명, 중선거구제는 2~4명, 대선거구제는 5명 이상을 선출한다. 소선거구제든, 중·대선거구제든 유권자는 1명에게만 표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소선거구제에서는 해당 선거구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1위 후보만 당선되고, 중대선거구제에서는 득표수 2위, 많게는 10위까지 당선될 수 있다.
중대선거구제에서 다양한 유권자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권자의 성향 비율이 진보 50%, 보수 30%, 중도 20% 정도인 지역구 A의 국회의원 선거에 보수 정당 (가)의 후보 a, 진보 정당 (나)의 후보 b와 c, 진보 성향의 군소 정당 (다)의 후보 d가 출마한다고 해보자. b는 재선에 도전하는 인지도도 높은 정치인이고, c는 30대 신인 정치인이다. 소선거구제에서는 b가 당선될 확률이 매우 높다. 따라서 b에게는 본 선거를 치르는 것보다 정당 (나)에서 계획대로 지역구 A 공천을 받는 게 더 중요하다.
중대선거구제가 도입되면, 지역구 A는 인접한 지역구 B(진보:보수:중도 비율 동일)와 통합된다. 지역구 A+B에서는 4명의 지역구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됐다. 이렇게 되면 우선 후보자 수가 많아진다. 정당 (나)는 b와 c를 포함해 후보 3명을 낸다. 정당 (가)는 후보 2명을 내고, 정당 (다)는 후보 1명을 유지한다. 진보 성향 유권자가 많다는 조건은 동일하지만, 투표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보수 정당 후보 당선을 막기 위해 후보 b를 뽑아야 했던 후보 c, d 지지자는 소신 투표를 할 수 있다. 두 후보가 4위 안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보수 정당 후보의 당선 확률도 올라간다.
즉 중대선거구제에서는 정치인의 대표성이 높아지고, 낙선한 후보에게 던져지는 사표가 줄어든다. 싫어하는 정치인을 떨어트리기 위한 투표보다 내가 원하는 정치인을 위한 투표가 많아진다. 공천이 당선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공천을 위한 당내 권력다툼이 완화된다. 대신 ‘소신 투표’할 유권자를 모으기 위해 정책 경쟁에 집중하게 된다. 또한 전국적 의제에 목소리를 내는 후보자가 늘어날 수 있다. 소선거구제에서는 좁은 선거구 안에서 눈도장을 찍는 일이 중요했기에 지역 의제가 전국적 의제보다 우선시됐다. 하지만 선거구가 넓어지고 후보자 수가 많아지면 전국적 인지도가 높아야 유리하다. 지역과 국가의 비전을 모두 챙겨야만 한다.
여기까지는 중대선거구제 ‘희망편’이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 중대선거구제에도 단점이 있다. 유권자 입장에서는 후보자를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후보자 입장에서는 선거구가 넓어진 만큼 선거활동 비용이 많이 든다는 문제가 있다. 자금이 부족한 소수 정당은 더욱 곤란하다. 투표의 가치가 달라지는 문제도 발생한다. b가 40%, d가 10%의 득표율로 당선되어도 b와 d는 같은 국회의원이다. d가 받은 한 표가 b가 받은 한 표보다 큰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중대선거구제, 왜 필요할까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중대선거구제가 대안으로 떠오르는 이유는 정치적 양극화다.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양당제의 갈등과 지역주의다. 양당제는 집권당이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고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고 유권자가 선거에서 정당을 선택하기도 쉽다는 장점이 있는 제도다. 그러나 한국의 양당제는 이런 장점보다 단점이 두드러지는 모양새다.
우선 중재 세력이 없어 양당의 대립이 격해지면 정치적 타협이 어렵다. 작년 말, 2023년도 예산안을 두고 양당이 입장차를 좁히지 못해 예산안 통과가 미뤄진 것이 대표적이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정치는 극단화되고, 양당 지지자들 사이의 반목도 심해진다. 특히 한국의 양당제는 지역주의와 결합하면서 더 심해진다. 지역주의는 거대양당의 입지를 공고히 하며 양당제를 정착시키고, 이를 아는 양당은 지역주의를 부추기거나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 상황을 만든다.
한국에서 다당제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는 것은 양당제와 지역주의가 만들어낸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제3정당이 자리잡으면 양당의 갈등을 중재하고 특정 정당의 지역 독점에 균열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다당제가 성립되긴 어렵다. 득표율 1위 후보자만 선출되면 유권자들은 투표의 효능감을 찾기 위해 당선 가능성이 낮은 정당을 선택하지 않게 된다. 세력이 약한 정당들은 정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통합하거나 큰 정당에 흡수된다. 결국 남는 선택지는 거대양당 뿐이다. 따라서 다당제 성립을 위해선 소선거구제를 폐기하는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고, 다당제와 어울리는 중대선거구제가 대안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중대선거구제는 만병통치약?
현행 선거제도의 문제점을 따져보면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이 일면 타당해보인다. 그러나 중대선거구제는 조심스럽게 들어야 하는 칼이다. 소선거구제는 양당제, 중대선거구제는 다당제에 어울린다고 해서 중대선거구제가 더 나은 제도인 것은 아니다. 각 국가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더 적합한 선거제도가 있을 뿐, 중대선거구제 도입이 한국 정치의 긍정적 변화를 무조건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중대선거구제의 단점은 이론 상의 문제다. 현실 정치의 복잡성 위에 중대선거구제를 겹쳐보면 또 다른 변수들이 눈에 띈다. 이 문제들은 이론 상의 단점보다 치명적이다. 제도 개혁의 의미가 사라질 수도 있을 만큼 말이다. 우선 지역주의 완화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예를 들어 21대 총선에서 호남 지역은 민주당이 거의 독식했다. 2등을 차지한 후보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후보가 아니라 민주당계 정당 또는 민주당 출신 무소속 정치인이었다. 중대선거구제 하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정당 다양성은 확보되지 못한다.
중대선거구제가 다당제를 정착시킬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중대선거구제가 실시된다면 21대 총선에서 낙선했지만 10% 이상의 득표율을 보인 정의당 여영국, 이정미, 윤소하, 권영국과 같은 후보들도 당선을 노려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다. 중대선거구제에는 거대 양당의 중복 공천부터 늘어나는 선거비용, 인지도 경쟁까지 소수 정당과 신인들을 불리하게 할 요소도 내포돼있다.
당내 계파정치도 오히려 심해질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일본이다. 일본은 중대선거구제를 계파정치 심화의 원인으로 보고 폐지했다. 일본은 자민당의 장기집권으로 인해 정당보다는 자민당 내 계파들을 중심으로 권력 다툼이 진행되고 있는데, 중대선거구제로 한 당에서도 여러 후보가 당선될 수 있게 되자 공천을 두고 계파정치가 심해졌다. 한국의 경우, 지역주의로 인해 압도적으로 유리한 지역의 공천을 두고 계파경쟁이 더 치열해질 수 있다.
중대선거구제의 기초부터 심화, 이론부터 현실까지를 훑어봤다. 이어지는 의문은 이렇다. 좋은지 나쁜지를 떠나 일단 중대선거구제를 실시할 수 있을까?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만들고자 하는 다당제가 한국 정치 현실에 어울릴까? 다음 파트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by 에디터 건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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