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ke'가 미국 정치의 블랙홀이 된 사연
미국 정치에서 ‘woke’라는 표현은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매우 부정적인 표현이 됐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여러분은 어떤 감정을 느끼시나요?
이 표현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용하며 유명해졌습니다. 평범한 시민이 늘 깨어있어 정치에 직접 참여해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의 철학을 상징하는 표현인데요. 보수 정권이 반민주적인 행보를 보일 때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의 구호로도 쓰였습니. 하지만 현재는 ‘깨시민’이라는 약칭 혹은 멸칭으로 불리며, 진보 진영에 대한 조롱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처럼 특정 용어의 의미가 정치에 의해 변질되는 현상이 종종 있습니다. 미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woke’라는 표현입니다. 직역하면 ‘깨어있다’는 의미로, 우리나라의 ‘깨시민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woke’는 현재 미국 보수 세력에 의해 매우 효과적인 정치 선동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표현이 어떻게 미국 정치를 달구게 됐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Woke’의 기원: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이념
일단 ‘woke’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정확하지 않습니다. ‘woken’, 혹은 ‘awaken’이 바른 표현인데요. 문법이 정확하지 않은 형태로 사용되는 것에도 사회적 맥락이 있습니다.
‘woke’라는 표현은 미국 흑인 방언(African-American vernacular English)으로, 20세기에 인종차별 대항 운동을 펼쳐왔던 흑인들로부터 비롯됐습니다. 2014년 ‘Black Lives Matter’(줄여서 BLM,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는 뜻) 운동이 일어나며 ‘woke’는 더욱 확산돼, 2017년엔 옥스퍼드 사전에도 등재됐습니다.
미국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다면 ‘woke’를 한 번쯤 접해봤을 수 있습니다. 2016년 빌보드 차트에 오른 차일디쉬 감비노의 <Redbone>에 “stay woke”(깨어있으라)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가사 안에서의 용례만 따진다면 ‘정신 차리고 남자 조심해라’는 의미지만, 사실 이를 듣는 미국의 많은 흑인 청취자들은 자연스럽게 BLM 운동을 떠올리게 됩니다. “Stay woke”이라는 표현이 당시 이 운동을 상징하는 슬로건이었거든요. ‘흑인을 향한 인권탄압에 맞서 깨어있으라’는 메시지로, 작사가가 의도적으로 중의적인 표현을 넣은 것이죠. (참고로 Childish Gambino는 그동안 사회적으로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을 만들어왔습니다. 2018년 발매된 <This Is America>의 뮤직비디오는 수많은 미국 대학 사회학과에서 수업과 논문 주제로 다뤄지기도 했었죠.)
이런 맥락으로 인해 <Redbone>은 조던 필 감독의 영화 <겟 아웃>에서 OST로 쓰였습니다. 이 영화는 미국 내 흑인 사회가 느끼는 억압을 장르적으로 잘 녹여내 평단의 극찬을 받은 영화입니다. 조던 필 감독은 <Redbone>의 “stay woke”라는 가사가 ‘흑인 공포 영화’라는 본인의 장르에 적합했기에 OST로 선택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woke’라는 표현은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엔 성차별, 성소수자 차별 등 미국의 사회적 정의 이슈를 포괄하는 표현으로 확장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과 몇 년 전까지 ‘woke’는 대중적인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사용되더라도 긍정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요. 하지만 현재 ‘woke’는 매우 대중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이 됐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미국 보수가 ‘woke’를 정치화하기까지
2021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보수 미디어와 정치인들은 ‘woke’를 폭발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woke’의 대중화는 전략적, 점진적으로 이뤄졌는데, 그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의제가 있었습니다. 구조적 인종차별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보수가 ‘woke’를 반어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두 이슈에 대한 백래시의 일종입니다.
백래시: 진보적인 변화에 반발하는 움직임
대체로 미국의 보수는 ‘구조적 인종차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진보는 이를 의제화해 백인을 악마화하며 인종 갈등을 부추긴다’는 입장입니다.
2020년 5월 말, 대선을 6개월 앞두고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터졌습니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무고한 흑인 시민이 사망하는 사건이었는데요. 이를 계기로 BLM 운동이 격화되며 구조적 인종차별에 대한 논의가 뜨거워졌습니다.
공화당과 보수 미디어는 BLM 운동의 폭력성을 강조하며 ‘법과 질서’를 확립하겠다고 호소했습니다. 인종혐오의 딱지를 오히려 BLM 운동에 붙이는 전략과 동시에 말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바이든이 당선되며, BLM 운동과 공화당의 전략이 중도 성향의 표가 바이든에게 몰리는 데 기여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트럼프 낙선 후 극우 유권자들은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에 난입하기에 이릅니다. 전문가들은 인종문제가 국회의사당 난입 사건의 핵심 정서라고 분석합니다. 극우의 입장에서 ‘구조적 인종차별’은 존재하지도 않고 오히려 백인이 위협받고 있는데, BLM의 여파로 바이든이 당선되기까지 하자 울분이 터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미국의 보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선 ‘진보 진영이 문화를 점령해 보수를 억압한다’는 입장입니다. 여기에 불을 지핀 것도 트럼프 전 대통령입니다. 그는 평소에도 트위터를 활용해 거짓 선동을 일삼아왔는데요. 국회의사당 난입사건의 발단 역시 트럼프의 트위터를 통한 부정선거 주장이었습니다. 이에 트위터는 추가로 폭력을 조장할 위험을 이유로 트럼프의 계정을 차단했습니다. 그러자 트럼프 지지자들은 ‘표현의 자유’를 들고 나오며 항의했습니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좌편향됐고, 보수 인사들을 억압하다 못해 트럼프의 표현의 자유마저 박탈했다’는 논리입니다.
이렇듯 대선에 패배한 우파 유권자들은 ‘미국이 좌파에 지배당했다’는 정서로 통합됐습니다. 좌파가 ‘다양성’과 ‘포용’이라는 가치관을 내세워 백인들을 역차별하는 구조를 만들었고, 문화적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며 기독교적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보수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세계관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러한 정서는 2022년 월스트리트저널이 실시한 조사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차별에 관한 인식을 묻는 조사였는데, ‘백인이 차별받는가’라는 질문에 무려 59%의 공화당 지지자와 21%의 민주당 지지자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반면 ‘흑인이 차별받는가’라는 질문에는 49%의 공화당 지지자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차별받는가’라는 질문에는 61%의 공화당 지지자가 동의했습니다.
즉, 현재 공화당 지지자들은 미국에서 흑인이 받는 차별보다 백인과 기독교인이 받는 차별이 훨씬 크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우파의 전략: 비판적 인종이론(Critical Race Theory)
바이든 취임 후, 보수 전략가들은 이 정서를 기반으로 기발한 전략을 짜냅니다. 바로 ‘woke’에 대한 공격입니다. 유권자들의 다층적인 울분을 간단하게 포괄할 세계관을 발견한 것입니다. 진보의 모든 의제를 ‘woke’로 퉁치는, 편리하고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여러분이 분노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나요? 다 ‘woke’ 때문입니다.”
보수 언론은 우선 ‘비판적 인종이론’(critical race theory)이라는 개념을 띄우기 시작했습니다. ‘비판적 인종이론’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학술 용어입니다. 미국의 법학자 킴벌리 크렌쇼가 제시한 개념으로, 사회, 행정, 법 등 구조적인 측면에서 인종주의를 다루는 관점을 일컫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언론 폭스뉴스는 ‘비판적 인종이론’이 미국 정부 곳곳에 침투해 공교육과 직장을 점령했다는 보도를 쏟아냈습니다. 이론의 내용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거나 왜곡하면서 말입니다. 정부가 ‘비판적 인종이론’을 수용해 학교에서 ‘모든 백인은 인종차별주의자’이고, ‘미국은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적인 국가’라고 가르친다며 공포를 조장했습니다. 미국의 사회적 갈등의 원흉이 ‘비판적 인종이론’이라는 것입니다.
보수층이 이에 반응하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비판적 인종이론’이 곳곳에 침투한 것은 ‘woke’ 문화 때문이라는 메시지가 퍼졌습니다. 곧 ‘woke’는 성소수자 정책, 성평등 정책, 경제 정책 등 민주당의 모든 의제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습니다.
폭스뉴스가 ‘비판적 인종 이론’을 언급한 횟수를 보면 이 전략이 얼마나 노골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2018년에 0번, 2019년에 4번, 2020년에 78번, 그리고 2021년에는 무려 1,826번 입니다. 같은 시기 ‘woke’를 언급한 횟수도 이에 비례합니다. 그 결과 ‘woke’는 성공적으로 대중 정치에 안착했고,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를 비롯한 공화당 대권 주자들의 핵심 의제가 되었습니다.
‘Woke’ 비판 전략의 본심
‘비판적 인종이론’과 ‘woke’를 보수의 프로파간다로 만든 핵심 전략가는 보수 활동가 크리스토퍼 루포입니다. 그는 본인의 전략에 대해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대중이 신문에서 이상한 걸 읽을 때마다 ‘비판적 인종이론’을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적으로 그 용어를 해체했고, 미국인들이 싫어하는 모든 문화적 구성을 포괄하는 용어로 재구성할 것입니다.”
‘용어를 해체한다’, 용어의 본래 의미를 오염시켜 허상으로 만들겠다는 얘기입니다. ‘woke’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디샌티스 주지사와 비서진들조차 ‘woke’가 무슨 뜻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각자 다른 얘기를 했습니다. 즉 ‘woke’는 이제 텅 빈 기호에 불과합니다. 워싱턴포스트의 필립 범프 컬럼니스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단어는 경멸적인 표현 외에 아무 뜻이 없다. 그래서 공화당 정치인들이 이 단어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더없이 ‘잘 먹히고’ 있습니다. 지난 4월 CBS News가 공화당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 따르면, 가장 선호하는 후보의 조건 1위가 ‘‘woke’ 이념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무려 85%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갈라치기 정치, 효과와 해악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전임인 문재인 대통령과 당시 정권을 겨냥해 ‘반국가 세력’이라는 발언을 해 큰 논란을 빚었습니다. 이 또한 ‘woke’와 같이 실체는 없지만 상대를 공격하면서 강성 지지층을 결집하는데 효과적인 선동이었습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발언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전 주 대비 3.3%p 올랐습니다.
사회심리학자 헨리 타지펠에 따르면 인간 사회질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우리’와 ‘그들’을 분류하는 것입니다. 그의 실험에서 참여자들을 단순히 동전 던지기로 분류했을 때조차도 자신의 집단을 추켜 세우거나 상대 집단을 폄훼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선 편이 나뉘면 내 편에 대한 유대감, 상대편에 대한 적대감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분류가 이분법적일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됩니다. 따라서 미국과 한국 같은 거대양당 구조에서 ‘갈라치기 전략’은 유혹적인 카드입니다.
한편 타지펠은 집단의 구분 앞에서는 이익보다 승리가 더 중요한 목적이 되기에,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를 이기려 하는 위험이 발생한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공화당은 ‘woke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반ESG 법안의 통과입니다. ESG 관점에서 자산을 운용하는 기업들과의 거래를 중지하는 것입니다. 규제 대상이 된 거대 자산 운용사들이 일부 주의 연금기금에 막대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공화당 지지층도 연금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행보엔 반대하고 있지만, 공화당의 태도는 강경합니다. (이에 대해선 추후에 더욱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말이 있지만, 결국 본체는 하나입니다. 정당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할 수는 있지만, 국가를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없고 ‘우리’ 뿐입니다. 혐오와 정쟁을 조장하는 정치권을 구할 수 있는 이가 진정 ‘깨어있는(woke)’ 시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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