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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총장 몰아낸 미국판 공정 담론 ②

문화 전쟁은 몇몇 정치 집단과 미디어의 실체 없는 프로파간다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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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선 하버드대의 클로딘 게이 총장이 어떻게 반DEI 진영에 의해 끌어내려졌는지 살폈습니다. 이 작전에서 활약한 크리스토퍼 루포는 현재 미국 우파 여론을 주도하는 활동가입니다. 매우 매력적이고 효과적으로요. 그런 그가 스스로의 정치적 가치관과 삶이 형성된 곳이라고 칭하는본진’이 있습니다. ‘미국 우파의 수뇌부’로 불리는 클레어몬트 연구소(Claremont Institute)입니다.

운동의 수뇌부: 클레어몬트 연구소

클레어몬트 연구소의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2019년에는 트럼프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이곳의 임원인 존 이스트먼은 트럼프의 핵심 고문입니다. 그냥 고문이 아니라, 무려 ‘대선 뒤집기’ 전략을 창안해 트럼프에게 제공한 사람입니다.

클레어몬트 이사장인 톰 클링언스틴은 현재 공화당의 가장 큰 개인 후원자로, 2020년부터 지금까지 약 155억원(미화 116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습니다. 클링언스틴 이사장은 ‘트럼프를 정당화하는 지적인 논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클레어몬트가 만든 것’이라며 으스댔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연구소의 또다른 핵심 관계자인 플로리다 론 디샌티스 주지사는 ‘뇌가 있는 트럼프’, ‘더 똑똑해진 버전의 트럼프’ 라고 한때 불렸습니다.

2019년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인문학 훈장을 수여받는 클레어몬트 연구소의 라이언 윌리엄스 회장. ©클레어몬트 연구소 유튜브 채널

클레어몬트는 여론 형성에 온 힘을 쏟으며, 여기 참여할 전사들을 길러냅니다. ‘링컨 펠로우십’이라는 프로그램인데요. “국민의 마음이 전부다”라고 말한 공화당 링컨 대통령의 정신을 담겠다는 의미입니다. 루포를 포함해 아칸소주 연방 상원의원 톰 코튼, 스타 보수 논객 벤 샤피로, 피자 게이트 음모론 선동가 잭 포소비엑 등이 클레어몬트의 훈련을 거쳐 갔습니다.

이들은 우파가 좌파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논리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중 핵심은 ‘역차별’입니다. 차별을 없애기 위해 생겨난 DEI가 오히려 차별을 조장하며, 공정하지 못한 사회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20세기 중반, 남부의 인종 분리 정책 폐지와 1964년 민권법 제정으로 미국에서 모든 차별이 법적으로  폐지됐다. 드디어 미국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DEI 때문에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DEI는 차별을 해소하긴커녕, 한쪽이 받던 차별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즉, 이제 미국에서 차별받는 이들은 백인이라는 겁니다.

이들의 논리에 다르면 집단적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DEI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 무시당하는 사회를 만듭니다. 클링언스틴 이사장은 결과의 평등과 능력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이며, 무조건 한 쪽이 이겨야 끝나는 싸움이라며, 현재 상황은 미국 남북전쟁 때와 같이 “노예제 옹호 진영과 자유 진영 간의 내전 상황”이라고 묘사했습니다.

클레어몬트 연구소는 다른 보수 씽크탱크, 정치인, 언론과 함께 교육계에서 DEI를 무너뜨리기 위한 총력전을 벌입니다.

클레어몬트와 긴밀히 소통하는 맨해튼 연구소(Manhattan Institute)는 대학계를 타깃으로 한 반DEI 법안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습니다. 2023년부터 총 24개 주에서 이를 기반으로 한 반DEI 법안 52건이 발의됐죠. 이 중 5개 주에서는 이미 법안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반DEI 법안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 입니다.

  • 대학교에서 DEI 관련 부서 또는 전문가 활동 금지
  • 다양성 교육 필수화 금지
  • 채용·승진 과정에서 ‘다양성 선언문’(diversity statement) 활용 금지

* 다양성 선언문: 개인·단체의 다양성 가치에 대한 결의를 다짐하는 서류로, 많은 곳에서는 주로 교수진 임용 과정에서 이력서 등 서류 외에 추가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 입학·채용 과정에서 인종·성별·국가적 배경 등 고려 금지
2019년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인문학 훈장을 수여받는 클레어몬트 연구소의 라이언 윌리엄스 회장. ©클레어몬트 연구소 유튜브 채널

공정 담론의 민낯은 불공정

반DEI 전쟁의 본진은 플로리다주입니다. 문화 전쟁을 최전방에서 이끄는 정치인, 론 디샌티스 주지사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플로리다의 대학을 넘어 공교육 전체에 극단적인 반DEI 행정을 펼쳤는데요.

우선 2022년 3월, 일명 ‘게이 발언 금지 법안’(Don’t Say Gay Bill)이 통과됩니다. 공교육에서 3학년 이하의 학생에게 성정체성에 대해 가르칠 수 없게 하는 법안입니다. 작년에는 12학년 아래, 즉 모든 청소년을 대상으로 확대됐습니다. 성정체성 뿐 아니라 성교육 자체에도 제한을 뒀습니다. 초등학생들에게 월경에 대한 교육조차 금지한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죠.

‘게이 발언 금지 법안’ 하에 플로리다주 공영 도서관에서는 대대적인 도서 검열이 시작됐습니다. 성에 대한 표현을 일일이 검토하고, ‘부적절한 표현’이 있는 책은 퇴출하려 했죠. 성소수자 작가가 쓴 자전적인 에세이 같은 것이요. 많은 책들이 금지 서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한 학군의 검토 목록에는 웹스터 학생 사전, 기네스북, 안네의 일기, 맬컴 엑스 자서전 등 대중적인 필독서도 포함돼 충격을 주었습니다.

플로리다 교육계의 공정 담론은 성정체성을 넘어 인종까지 확대됐습니다. 우파 진영은 DEI로 인해 잘못된 인종적 가치관이 확산하였다는 인식을 공유합니다. 백인을 지나치게 ‘가해자’로만 묘사한다는 것이지요.

플로리다 교육위원회는 중학교 교육 과정에서흑인 노예제도의 장점’에 대해 교육하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노예 제도와 같은 상황이었더라도, 일부 개개인은 ‘노오력’과 ‘끈기'를 통해 부커 T 워싱턴과 같이 훌륭한 교육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설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예를 들면 일제 치하에서도 윤동주 시인은 스스로 열심히 공부를 해 훌륭한 문학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큰 틀에서는 일제 식민지배 덕분에 조선이 근대화 했다는 논리와 비슷합니다. 더불어 고등학교에서는 ‘미국 흑인 역사 교양 과정’(AP African American History)이 폐지됐습니다.

디샌티스 주지사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공교육을 통해 세뇌가 아닌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겠다.” 반DEI 운동의 대의도 이와 같습니다. 이념적 요소를 걷어내 진정한 학문의 자유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반DEI 운동은 오히려 이념을 강화하고 학문의 자유를 위축시켰습니다. 성소수자, 소수인종 등의 학생을 차별하는 행태로 전개됐고요.

유세현장의 론 디샌티스 주지사와 크리스토퍼 루포. ‘Woke를 멈춰라', ‘비판적 인종이론 반대' 등의 팻말이 보인다. 디샌티스 주지사 앞에 적힌 문구는 ‘세뇌로부터의 자유’. ©Daniel A. Varela / MCT

반DEI 진영은 자유와 평등, 공정을 앞세웁니다. 그들은 이 가치에 ‘진심’인 걸까요? 지난 1월 20일, 뉴욕타임스는 반DEI 진영 리더들이 주고받은 수천 건의 이메일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이들의 솔직한 대화는 혐오로 가득했습니다. 동성애는 범죄이고 이주노동자는 덜떨어진다는 표현, 여성 외모 비하와 가부장제 옹호 등이 담겨있었습니다.

공정이라는 허울 아래 이들이 감추고 있던 것은 혐오와 차별이었습니다. 하버드의 게이 총장도 능력과 공정을 이유로 공격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흑인 비하 발언이 담긴 살해 협박 이메일을 수차례 받았습니다.

게이 총장은 “나에 대한 공격은 미국의 가치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장에서 하나의 전투에 불과했다”고 말했습니다.  반DEI 진영에게 공정은 수호해야 할 가치가 아닌, 상대 진영을 무너뜨리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DEI에 대한 '진짜 여론'

DEI에 대한 미국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어떨까요? 여러 설문조사를 종합해보면, 대부분의 미국인은 DEI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DEI가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닌 ‘실제적 가치’로 취급되었을 때에요. 일터와 대학교에서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을 늘리기 위한 정책이 각각 56%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기업에서 DEI 교육을 금지하는 것에는 66%가 반대했고요.

DEI에 관한 여러 여론조사. 맨 위에서부터 ‘일터에서 DEI를 늘리기 위한 노력에 대한 지지/반대', ‘대학의 DEI 정책에 대한 지지/반대', ‘정부가 공공대학에 DEI 정책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지지/반대', ‘기업의 DEI 교육을 없애는 것에 대한 지지/반대' ©Good Authority

한편, 공화당 지지층 대다수도 반DEI 진영의 문화 전쟁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습니다. 플로리다주의 ‘책 검열’에 대해 공화당 지지자의 52%가 반대했습니다. 학교에서 노예제, 인종차별, 인종 분리 정책 등 미국의 ‘흑역사’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는 의견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대다수가 동의했습니다. 공화당 지지자의 78%, 민주당 지지자의 85%가 찬성했어요.

표면적으로는 DEI라는 의제가 미국을 양극화 한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실상은 DEI의 지향점에 대다수의 미국인, 심지어 공화당원들도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화 전쟁은 몇몇 정치 집단과 미디어의 실체 없는 프로파간다일 수도 있습니다. 이념적 양극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닙니다. 실제보다 과장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최근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물러난 디샌티스 주지사가 이를 반증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한 때 트럼프 전 대통령을 위협하는 주자로 급부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기가 사그라들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디샌티스의 지나친 이념전쟁 주요 패착으로 꼽습니다.

디샌티스는 용어들을 발굴해 내어 의미를 왜곡시키는 전략을 택해왔습니다. ‘비판적 인종이론’ (CRT), DEI, woke, ESG 등 온갖 ‘전문용어’로 억지 세계관과 논리들을 만들어 냈죠. 그럴수록 유권자들은 지쳐갔습니다. 주류 보수 미디어의 힘을 빌려 반짝 관심을 끌었지만, 대중성이 갈수록 떨어졌습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많이 사용해왔던 ‘woke’ 가 본격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자 자취를 감추었어요.

심지어 미국 정치의 이념적 양극화의 주범인 트럼프조차 이념 전쟁에서 한발 물러섰습니다. 최근에는 낙태 이슈에 대해 전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태도를 보였죠. 한 공화당 전문가는 “트럼프는 문화 전쟁이 너무 나갔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고 평했습니다.

DEI 프레임의 유통기한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반DEI로 상징되는 이념 전쟁이 미국 내에서 힘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 지점은, 정치권과 언론발 논란이 실제 국민들의 생각과 여론을 항상 정확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란 겁니다.

이념적 갈라치기는 지지층을 결집해 파급력을 만들어냅니다. 정치인이 쉽게 빠져드는 유혹이고, 실제로 꺼내 드는 카드죠. 하지만 유권자들은 이념 전쟁이 길어지면 피로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정치인은 결국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정치가 표면적인 이념 전쟁으로 달아오를수록, 현명한 유권자들의 큰 그림을 보는 훈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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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빅

지금 내가 서있는 곳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평화적 공존과 환대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을 위해 활동해왔습니다. 미국에서는 난민과 이민자 출신 청소년들과 주로 함께했는데, 한국에 와보니 정치와 시민 사이에 쌓인 게 많아보였습니다. 둘 사이가 좀 더 친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애정클을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