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미국인들
정전 70주년 in DC 후기 #3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한 때 모두의 염원이었던 이 노랫말은 현재 청년 세대에게는 더 이상 와닿지 않습니다. 한국 전쟁은 당시 한반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인 약 3-4백만의 민간인 사망자를 낳았지만,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현 세대는 그 아픔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시간이 약이 되어 자연스레 아픔이 치유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가 겪는 다양한 문제들은 70년간 이어져온 분단 체제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징병제에 얽힌 젠더 갈등부터, 세계 4위 수준의 안보 비용으로 인해 복지, 교육 등 안정적인 정치·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사업들이 우선 순위에서 밀리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은 한반도 분단의 트라우마와 여파는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은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가 한 국가를 대상으로 참전한 전쟁으로, ‘세계내전’의 성격을 띕니다. 북한 지역에서 수습되지 못한 미군 사망자는 6,000명 가량으로 유족들은 여전히 유해를 찾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 한반도 평화를 갈망하는 세계 시민 500여명이 정전 70주년을 맞는 7월 27일 워싱턴 DC에 모였습니다. ‘한반도 평화행동’(Korea Peace Action)이라는 행사를 위해서입니다. 현재 미 하원에 계류 중인 한반도 평화법안(H.R.1369: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Act)에 대한 지지를 결집하는 행사인데요. 이 법안은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 여행금지 조치 해제 및 평화협정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가 특별히 뜻깊었던 것은 구성원의 다채로움 때문입니다. 미국의 정치인들을 비롯해 평화공공외교를 펼쳐온 유권자 단체들, 북한에 인도적 지원활동을 펼쳐온 단체, 여성 평화운동 단체, 미국의 참전용사 단체, 반전단체, 종교단체 등 실로 다양한 이들이 참여했는데요. 행사를 이끈 크리스틴 안 대표의 말대로 다세대(multi-generational), 다인종(multi-racial), 다분야(multi-sectoral)의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한국인이 아닌 미국의 정치인 및 활동가들은 왜 한반도 평화에 관심을 갖고 이 운동에 동참하게 된 걸까요? 행사에 참여한 이들에게 직접 그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미국인들이 동참하는 이유
한 가지 발견되는 공통점은 미국인으로서의 책임 의식이었습니다. 미국은 한국 전쟁을 싸운 당사국이기도 하며, 정전 협정의 서명국으로써 한반도 평화문제에 있어 큰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평화법안을 공동발의한 캘리포니아 바버라 리 하원의원의 아버지는 한국전 참전 용사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한국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들어왔기 때문에 늘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고 말했습니다. 7월 27일 ‘한반도 평화행동’의 기획으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집단적 망각상태에서 깨어나 (한국) 전쟁이 야기한 파괴를 기억해야 하며, 세계 평화와 인간 안보(human security: 군사가 아닌 인간에 초점을 둔 안보)에 뿌리내린 새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리 의원은 미국의 과도한 군사화를 늘 비판해왔습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대통령이 의회 동의 없이도 군사력을 발동할 수 있게 한 ‘무력사용권한’ 법안이 통과될 때, 유일하게 반대 투표를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미군이 북한 도시의 80%를 파괴하고 천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을 발생시킨 것에 대한 책임을 묻기도 했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군사 고도화와 핵 위기 비용이 미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부담된다며, 미국의 가장 오래된 전쟁을 끝내고 한반도에 지속적인 평화를 건설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함께 기자회견에 참여한 댄 리프 미군 예비역 공군 중장으로부터도 비슷한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리프 중장은 미군 태평양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근무했으며 한국에서도 연합사령부에 복무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 핵 공격 수행 훈련을 받았고, 한반도에 얼마나 과도한 군사력이 포화돼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칫 실수 하나(one bad decision)로 북한과의 핵전쟁에 돌입할 수 있다”며, 이를 근본적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평화협정을 추진하는 게 답이라고 말했습니다.
세계적인 여성 반전 평화 운동단체 '코드핑크'의 메디아 벤자민 대표는 평화활동가로서 한반도 평화법안을 지지했습니다. ‘코드핑크’는 지난 20년 간 미국이 일으키는 전쟁에 반대하며 군비로 지출되는 예산을 기후위기, 보건복지, 교육 등의 예산으로 돌리는 운동을 해왔습니다. 북한을 방문했고, 한국의 미군 기지 확장 반대 시위에도 참여했습니다. 벤자민 대표는 “한반도 분단은 미국의 군비 증강을 불러일으키며, 기후위기로 인류의 생존이 걸려있는 현재 군산업체의 배만 불리기 때문에 결국 한국인 뿐 아니라 나와 자녀들, 손자 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이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반도 평화가 간절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한국전 포로 및 행방불명자 유가족협회의 릭 다운스 대표가 그러했는데요. 7월 28일 열린 학술회의에서 그는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그의 아버지의 유해를 아직까지 찾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2차세계대전 참전 용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새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려던 찰나 예비군으로 소환돼 한국 전쟁에 참전하게 됐고, 10개월 후 연락 두절됐다고 합니다. 2016년 평양을 방문한 그는 아버지의 유해가 있을 만한 곳을 비행하기까지 했지만, 미국 정부의 불허로 발굴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북한 영토 내 미군 유해가 있는 곳의 정보를 상세히 알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기 위해 우선 정부 간 소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번 회기에서도 한반도 평화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현 미국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가 냉담하기 때문입니다.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솔직히 말해서 평화협정보다는 당장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당장의 위협은 점점 더 위험해지는 북한의 미사일 및 핵 프로그램과 전례 없는 횟수의 (미사일)발사”라고 말했습니다.
한반도 평화법안이 의회에 상정된 것은 미국의 풀뿌리 시민단체들이 이뤄낸 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 워싱턴DC에 모인 단체들은 그동안 한반도 평화법안이 미국 의회에서 상정되고 통과될 수 있도록 미 전 지역구에서 풀뿌리 로비활동을 하며 연대해왔습니다. 그 결과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던 시기인 2019년 2월, 민주당 로 칸나 하원의원을 통해 ‘한국전 종전 촉구 결의안(H.Res.152)’이 발의되어 51명의 공동발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2021년 5월에는 브래드 셔먼 의원에 의해 한반도 평화법안(H.R.3446)이 발의되어 45명의 공동발의를 이끌었습니다. 올해 3월 역시 셔면 의원에 의해 재발의(H.R.1369)돼 현재까지 33명의 공동발의자가 모였는데요. 셔먼 의원이 한반도 평화법안을 대표발의 하기까지는 그와 꾸준히 소통하며 설득한 미주민주참여포럼(KAPAC)의 노력 또한 있었습니다. 셔먼 의원이 한 인터뷰에서 “(법안 관련) 모든 아이디어는 미주민주참여포럼과 최광철 대표가 알려준 것”이라고 밝힐 정도입니다.
2021년, 한반도 평화 협정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시각을 묻는 한 조사에서 지지한다고 응답한 미국인의 비율은 41%였습니다. 그러나 2023년 조사에서는 52%의 미국인이 지지를 나타냈습니다. 미국 정부가 얼어있는 와중에도, 한반도 평화를 향한 미국 시민사회의 지지는 자라나는 중입니다.
한반도 평화법안이 발의된 시기는 늘 북미관계가 좋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단체들의 지속된 활동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불씨가 미국 의회에서 회기를 거듭하며 지켜져 왔습니다. 이번 ‘한반도 평화행동’은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으며, 세계시민들을 통해 평화의 싹은 점점 자라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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