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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의 책임

애정클
애정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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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참사? ‘고작 말 한 마디’가 중요한 이유

정치에서는 말 한 마디가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 156명의 사망자를 낸 이태원 참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태원 압사 사고를 두고 정부는 ‘참사’라는 표현 대신 ‘사고’라고 지칭하라는 내부 지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또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희생자’ 대신 ‘사망자’ 또는 ‘사상자’라고 지칭하도록 했다.

이는 정부가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중립적인 표현을 쓰려 한 것으로 이해된다. ‘참사’는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라는 뜻으로, 사건이 심각하고 끔찍하다는 평가를 담고 있다. 반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이라는 뜻으로, 사건을 우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 규모의 중대함에 대한 평가를 담지 않는 표현이다.

사고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을 ‘희생자’ 대신 ‘사망자’‘사상자’라고 지칭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희생’은 외부적 요인으로 불행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뜻으로 목숨을 잃게 한 외부의 요인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반면, ‘사망’은 단순히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건에 대한 책임론이 부담스러운 정부 입장에서는 좀 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표현을 쓰려는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사고 직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박희영 용산구청장, 그 밖에 여러 정부 당국자들이 사건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언행을 보인 가운데 이런 지침까지 내려오자 정부가 수습과 진상 규명, 재발 방지보다 책임 회피에 더 치중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에 반해 야당 측은 이 사건을 ‘이태원 사고’가 아니라 ‘이태원 참사’라고 부를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여론의 반발도 거세지자 서울시는 서울광장 합동 분향소의 명칭을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 분향소’로 수정했다. 외신 기자회견에서 이번 사건을 ‘사고(incident)’라 지칭한 한덕수 총리도 며칠 만에 표현을 바꿔 이번 사건을 ‘참사’라고 지칭했다.

‘네 탓이오’ 책임감 없는 꼬리 자르기

반복된 정치싸움에 질려버린 국민들에게는 정당들이 단어 몇 개를 두고 말꼬리를 잡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에서 단어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길고 장황한 설명 대신 단어 하나로 정치인과 정당의 생각을 보여줄 수 있다. ‘참사’ 대신 ‘사고’라는 표현을 쓰고, ‘희생자’ 대신 ‘사망자’라는 표현을 썼을 때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며, 정부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사고 발생 이후 경찰과 지자체의 상황 파악 및 대처가 늦어진 게 밝혀지며 경찰과 지자체 등에 책임이 쏠리고 있다. 경찰이나 소방 당국의 대응에 과오가 있었다면 엄중히 가려내 징계 및 처벌을 내려야겠지만, 정부와 정치인들의 전반적인 의식 수준부터 근본적으로 점검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과연 정부가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을 충분히 공유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대통령실이 공개한 윤석열 대통령 집무실 책상의 명패.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수 차례 이를 언급하며 자신의 책임을 강조해왔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 이번 사태는 일부 조직의 기강 해이나 일탈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부는 경찰의 부실 대응이 밝혀지기 전 여러 차례 ‘주최 측이 없어 안전 관리가 어려웠다’는 태도를 보이며 책임을 회피해왔다. 대통령실을 비롯해 범정부 차원에서의 책임의식이 부족했음을 반성하지 않고 일선 행정 조직의 잘못만을 꾸짖는 것은 근본적 해결 없는 ‘꼬리자르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 비슷한 사례로 참고할 수 있는 것이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벌어진 해양경찰청 해체다. 당시 정부는 구조 의무를 다하지 않은 책임을 물어 해양경찰청을 해체하고 국민안전처 산하의 ‘해양경비안전본부’로 조직을 개편했다. 제1야당이던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를 두고 정부가 하부 조직에 책임을 전가한 채 실질적인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직 개편으로 이름과 일부 직제가 변경됐지만 사실상 조직 자체는 유지돼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결국 해체 3년 만인 2017년, 해양경비안전본부는 해양경찰청으로 복원됐다.
  • 당연히 경찰의 무능력한 대처는 이번 사태의 직접적 원인이 된 가장 심각한 문제다. 국가애도기간이 끝난 뒤 열린 국가안전점검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권한이 없다는 말이 나오느냐”며 경찰을 강하게 질책했다. 그러나 대통령실 역시 참사 3일 뒤에 “주최 측의 요청이 없을 경우 경찰이 선제적으로 국민들을 통제할 법적 제도적 권한은 없다”며 이상민 장관을 두둔한 바 있다. 이번 참사의 책임이 경찰에만 그치지 않는 이유다.
  • 이상민 장관이 뒤늦게 인정한 것처럼, 국가는 국민의 안전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진다. 위험 예측과 예방부터 대처까지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국민들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수도 한복판에서 150명이 넘는 국민들을 잃고도 정부가 책임을 회피한다면, 국가의 보호에 대한 신뢰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 정부 당국자들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전반의 성찰도 필요하다. 일부 시민들도 이번 사태가 국가의 책임이라는 비판에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참사가 벌어지자 ‘국가가 놀러 갔다 죽은 사람들까지 책임져야 하느냐’며 희생자들을 모욕, 비하하는 인터넷 댓글들이 쏟아졌다. 개인의 공감능력 부재, 몰상식도 지적됐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의 합의와 관련돼 있다. ‘희생자들이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는 집단적 공감대가 우리 사회에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재난을 대하는 지도자의 마음

사회적 재난이 발생한 이후 국가 지도자, 정치인들의 태도는 국민 통합과 재난 극복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는 사례는 2014년 세월호 참사, 그리고 2008년 광우병 사태다. 두 사례 모두 대통령의 경솔한 발언이 정부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광우병이 확산될 것이라는 공포감이 확산되면서 벌어진 광우병 사태는 과장된 정보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의 소통과 설득이 실패한 측면도 크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따라 광우병이 퍼질 것이라는 우려가 국민들 사이에서 확산되자 ‘우리가 위험하면 못 먹는 것이고 안 먹는 것이다. 수입업자들도 장사가 안되면 안 들여올 것'이라고 말하며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보장하는 게 아니라 안전을 시장 논리에 맡기려는 듯한 발언 탓에 국민들의 불신은 더욱 확산됐다.
  • 세월호 침몰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하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해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그렇게 구하기 힘드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는 300명이 넘는 국민들이 여객선에 갇힌 채 침몰해버린 사건의 전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발언이었고, 대통령의 무관심을 목격한 국민들의 슬픔은 분노로 바뀌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중대본 회의에서 발언하는 박근혜 대통령. 이후 탄핵심판에서 대통령 측 대리인단은 ‘선실 내부에 떠 있을 것이란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윤석열 정부가 이번 재난을 효과적으로 수습하고 극복하고자 한다면 이전 정부들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한덕수 총리가 자청한 외신 브리핑에서 통역이 원활하지 않자 “이렇게 잘 안 들리는 것에 책임져야 할 사람의 첫 번째와 마지막 책임은 뭔가요?”라며 웃음을 지은 것 역시 심각한 공감능력의 부재였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지만, 슬프게도 한국 정치에서 말로 천 냥 빚을 갚은 사례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말로 무거운 빚을 진 수 많은 정치인들만이 생각날 뿐이다. 이번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도 정치계에서는 실언이 잇따랐고, 각 당에서는 소속 의원들의 '입단속'에 열중해야 했다. 우리 정치에서는 언제쯤에야 정치인의 말이 ‘리스크’가 아니게 될 수 있을까.

by 에디터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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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의 정치클럽 팀이 함께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