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폴리틱스》는 영화나 드라마에 나타난 정치적 배경을 ‘덕력’ 넘치는 시각으로 파헤쳐보는 콘텐츠입니다.

한국에서 ‘나’의 특권이란

<아마겟돈 타임>을 다루기 전에, 먼저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언급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는 <아마겟돈 타임>을 낯설게 생각할 것이고, 글을 읽고 나서도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아마겟돈 타임>이 다루고 있는 사회적 주제는 동시대 한국 사회에 중요한 함의를 던진다.

2022년 연세대 청소노동자 파업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명문대 학생들이 청소노동자 파업이 공부에 방해된다며, 학내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대학 교수는 이런 대학생의 모습에 (말 그대로) 비분강개한다. 나는 이 사건을 보며, 청소노동자 파업을 시험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비토하는 대학생들이나, 배움을 청하는 대학생들이란 무릇 약자를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어투의 교수 모두 기묘한 엘리트 의식(특권의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둘의 특권의식은 다르다. 전자는 내가 돈을 낸 만큼 교육받아야 한다는 특권의식을, 후자는 대학생은 민중을 선도하는 선량한 엘리트라는 특권의식을 의미한다. 한 해에 적게는 400만 원, 많게는 800만 원을 내며 다니는 대학교는 중산층 특권의 기본적 전제를 의미한다. 특히, 다인종 국가에 비해 비교적 인종 문제가 첨예하지 않은 한국의 경우, 대학이란 특권을 가로지르는 경계다.*

특권의식에 일어난 저 미묘한 변화는 <아마겟돈 타임>에 더욱 적나라하게 반영된다. 미국은 한국과는 달리 다인종 국가며, 백인종 내에서도 와스프(WASP)라는 유별난 특권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겟돈 타임>의 시대적 배경인 1980년대는 차별이 가시적이지 않고, 비가시적인 형태로 변화했다. 1960년대에는 흑인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 히피 문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약자는 목소리를 높였고, 강자는 한 발짝 후퇴했다. 역사의 흐름이 뒤바뀐 가운데서 차별은 동일하지 않았다. 오히려 특권층은 신자유주의 경쟁을 위시해서 약자와 강자가 동일선상에 뛴다는 환상을 부여했다. 이 환상은 공정이라는 게임의 규칙으로 변했고, 오늘날 한국에서도 강력하다. 한국 관객들이 <아마겟돈 타임>을 봐야 할 이유다(나는 이 영화 홍보담당자는 아니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