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정치학교가 없어서 직접 만들었습니다
스튜디오 반전 배강훈 디렉터
대한민국은 학원의 성지입니다. 입시부터 취업까지, 어느 분야든 필요하다면 학원 문을 두드릴 수 있습니다. 딱 한 분야, 정치만 제외하고요.
그건 정치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학원은 ‘정답이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에 ‘합격 보장’과 ‘실력 향상’ 같은 슬로건을 내겁니다. 무엇이 좋은 정치인지, 어떤 의제를 우선순위에 둬야 하는지, 어떤 정책이 더 적합한지는 정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족집게 강의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라는 영역에는 학원보다는 학교가 필요합니다. 좋은 성적이 아닌 성장을 위한 배움이 있어야 할 겁니다. 구성원들이 소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제공해야 하고, 성숙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연습하는 작은 사회여야 합니다.
지난해 문을 연 ‘스튜디오 반전’은 이런 공동체를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선출직 인재 양성 과정인 ‘정치학교 반전'입니다. 지난 5월, 6개월의 과정을 거쳐 정치학교 반전 1기가 마무리됐습니다.
스튜디오 반전의 배강훈 디렉터는 직접 정치학교의 전 과정을 수강했습니다. 96년생, 올해 26세인 그는 반전이라는 실험에 뛰어든 개척자이자 선출직을 목표로 나아가는 청년 정치인입니다. 미대생에서 국회의원 비서관을 거쳐 반전 프로젝트의 디렉터가 되기까지, 정치와 일상을 연결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일해왔습니다.
6월 21일,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스튜디오 반전에서 배강훈 디렉터를 만나 스튜디오 반전의 모험을 들어봤습니다.
디자인에서 정치로
반전에서 어떤 일을 맡고 계신가요?
“우선 대학의 학생처 같은 업무를 맡고 있어요. 정치학교 수강생들이 만드는 기획을 지원하고요. 기반부터 다지다 보니 의외로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요. 커리큘럼부터 수료증 디자인까지 해야 했어요.
또 저희가 새로운 형태의 공론장 형성을 위한 기획도 추진하고 있어서요. ‘애증의 정치클럽’처럼 정치 영역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분들과 협업하는 기획을 하고요. 저희 공간을 문화적으로 활용하는 기획도 하고 있어요. 수료식에서 동료 수강생들에게 ‘밤 좀 그만 새 상’을 받을 만큼 바쁘지만, 하고 싶은 일이라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반전에서 일하게 되셨나요?
“20대 국회에서 국민의당 김성식 의원 비서로 일했어요. 임기가 끝나고 나선 일반 기업에서 일했는데, 의원님과 여러 고민을 공유하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돕게 됐어요. 듣다 보니 너무 하고 싶었고, 지금 해야만 하는 일 같았어요. 그래서 본업을 때려쳤습니다, 하하.”
김성식 전 의원은 스튜디오 반전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한나라당, 국민의당, 바른미래당을 거치면서 줄곧 문제해결의 정치를 강조해온 정치인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양당 모두에게 러브콜을 받았지만 거부하고, 미래 세대에게서 답을 찾고자 스튜디오 반전을 세웠습니다.
정치 분야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원래 전공은 디자인이었어요. 공적 영역과 일반 영역이 분절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디자인으로 이 문제를 재밌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했었죠. 사실 디자인은 세상에 개입하는 일이잖아요. 같은 책이어도 배열에 따라 테마와 콘셉트가 달라질 수가 있어요. 우리의 의식과 역사를 녹여낼 수도 있잖아요. 디자인과 정치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정치의 영향력과 효능감이 더 크긴 하죠. 원래 남한테 참견하는 걸 좋아해서, 정치를 하면 그건 더 잘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물론 그만큼 공적 책임을 져야 하고, 헌신해야 하지만요.”
흥미롭네요. 보통 정치는 다른 일보다 ‘큰 일’로 여겨지잖아요.
“정치는 세상에 많이 관여하는 일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큰 일’이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른 업과 비슷한 영역으로 내릴 필요도 있다고 봐요. 정치권에 있는 분들이 다른 영역을 무시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동일한 ‘업’의 위치로 놓으면 정치에 대한 생각도 바뀔 것 같아요. 정치에서도 내가 원하는 ‘디자인’이 뭔지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신사와 유니클로가 이미 있으니까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김성식 의원실에는 어떻게 지원했나요?
“유튜브에서 우연히 보고, 20대 총선에 국민의당 소속으로 출마했을 때 찾아뵀어요. 의원님이 견지하는 정치적 태도와 품격에 매료됐어요. 이런 분이 꼭 당선돼서 국회로 가길 바래서 캠프에 갔습니다.”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요?
“좀 재미없는 얘기하고(웃음), 안 되는 소리 하면서도 굴하지 않더라고요. 정치를 선악 구도로 보는 게 편하잖아요. 우리는 옳고 상대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선거에서든 삶에서든 이들과 투쟁해서 이겨야만 세상이 좋아진다. 이런 일반적인 문법에서 벗어난 얘기를 하시는 게 멋졌죠. 진짜 정치인 같았어요.”
정치학교가 가르치는 것
정치학교 반전의 커리큘럼은 화려합니다. 경제, 노동, 외교, 기후위기 등 중앙 정치인으로서 다뤄야 할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릅니다. 정치학 개념과 정치인의 마음가짐 등 추상적이지만 본질적인 영역도 다룹니다. 강사진은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현직 전문가들로 구성됐습니다. 어느 대학에서도 보기 어려울 과정입니다.
수업은 매주 토요일 6시간, 2개의 세션으로 진행됩니다. 각 세션은 강의 1시간, 토론 1시간, 질의응답 1시간으로 구성됩니다. 여느 학교가 그렇듯 출석률을 따지고, 과제도 있습니다. 수강생이 기획한 정책보고서와 캠페인 영상을 제출해야 합니다. 수료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총 34명 중 28명이 수료까지 달려왔습니다.
수업 분위기는 어땠나요?
“처음엔 데면데면했는데, 어느새 서로 고민과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이가 됐어요. 수강생 한 분은 ‘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28명의 동료가 생긴 게 반전 최고의 성과’라고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정당을 넘어서서 이런 얘기를 할 기회조차 없는 게 요즘 정치 상황이잖아요. 그걸 극복해보자고 한 진심이 통한 게 아닐까요?”
수강생들의 정치적 성향이 다양했나요?
“당적으로 따지면 무소속이 제일 많긴 했는데, 국민의힘, 민주당, 정의당, 녹색당 다 있었어요. 페미니즘 정당을 만들고 있는 분도 계셨고요. 배경도 다양해요. 활동가, 변호사, 대학생, 직장인, 노조원, 스타트업 직원… 다양한 얼굴의 청년들이 모였어요. 이미 본인의 의제와 관련해 활동을 하고 계신 분들이 많았고요.”
그럼 토론에서 의견 차가 두드러지기도 했을텐데.
“평행선을 달리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비동의 강간죄를 논의할 때, 여성 인권 활동가 분과 변호사 분 사이 논박이 있었어요. 하지만 좋은 일이었어요. 당연히 의견이 부딪힐 수 있는 건데, 지금은 그럴 공간도 없잖아요.”
강의 내용은 어땠나요?
“수강생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다 들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다’ 였어요. 듣고 보니 내가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특히 외교·안보 영역이요. 그런데 여의도는 더 해요. 정당 내에서 그런 토론회가 있긴 하지만 전혀 교육 관점으로 이어지지 않거든요. 문제를 인지했으면 정책에 반영을 하고 입장을 만드는 게 정당의 역할인데, 그런 과정이 없잖아요. 정치인들의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저희도 당장 대안을 내놓을 순 없어요. 앞으로 수강생들에게 남겨진 숙제입니다. 제가 가진 문제 의식은 세상이 격변하고 불안은 커지는데도, 정치가 일상의 삶과 너무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효능감을 주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거죠.”
가장 인상적인 강의는 무엇이었나요?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의 강의요. 듣고 나서 마음이 무거워졌어요.”
어떤 내용이었길래요?
“지금 한국 경제가 당면한 상황과 풀어야 하는 난제들에 대한 얘기였어요. 정치권에서 이 문제들이 의미 있게 소화되지 못하고 있는데, 해결책을 내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다른 수강생들도 비슷하게 느꼈어요. 나의 무지를 마주하게 되는 세션들이 있었어요.”
강사진이 굉장히 화려한데.
“운영위원들의 네트워크도 있었지만, 취지에 공감해 주신 분들이 정말 많았어요. 사실 저희가 어려운 요구를 했어요. 반전 맞춤으로 강의 자료를 부탁드렸어요. 매주 뉴스레터를 만들어서 수강생들에게 프리뷰를 제공하기도 했고요. 단순 강의에서 끝내지 않고, 지금 정치권에서 풀어야 될 문제와 가능한 대안을 공유하고, 수업 당시 이슈가 된 사안도 논의해주셨어요."
정치를 교육한다니, 내용의 편향성에 대한 우려는 없었나요?
“사실 편향적이랄 게 없어요. 예를 들어 기후위기를 다루는 전문가들은 모두 얼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어떤 대응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잖아요. 그리고 강사 분도 토론에 참여했어요. 일방적으로 강의를 듣는 게 아니라, 강의 내용에 대해 수강생들이 의견을 나누며 교집합을 찾아나가는 식이었어요.”
한국의 정치인 교육은 어떤 상황인가요?
“일본엔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經塾)’이라는 정치인 양성기관이 있어요. 2017년 즈음 한국 거대양당의 청년 정치인 두 명이 ‘마쓰시타 정경숙’을 찾아갔는데요. 한국에도 이런 정치 교육 기관이 있느냐는 질문에 두 분이 대답을 못했어요. 사실 정치인을 교육하고 성장시키는 건 정당의 일인데, 한국 정당들은 해외에 비해 이걸 잘 못하고 있어요. 특히 청년 대상으로요.”
정치학교 반전이 한국 최초의 정치학교인 것은 아닙니다. 2017년 바른정당 산하에서 만들어진 청년정치학교는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당에서 운영한 정치학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1개월 정도의 단기 과정으로, 교육보다는 정당 홍보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청년을 중심으로 6개월 이상의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곳은 정치학교 반전과 청년정치학교 뿐입니다.
청년 정치를 넘어서
정치학교 반전의 지원자격은 오직 하나, 만 40세 이하면서 피선거권이 있는 사람입니다. 단 2024년 총선 출마 희망자를 우선으로 받았습니다. 그만큼 정치학교 반전은 청년 정치인 배출에 진심입니다. 하지만 반전은 그만큼 ‘청년’이라는 키워드에만 기대는 것을 경계합니다.
청년정치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는 말이 나오는데요.
“청년이라는 키워드에는 ‘새롭다’는 진부함이 있어요. 약 10년 간 청년 정치가 대두되면서 주목받은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우리가 더 새롭고 좋다’는 말뿐이지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지 못한 건 솔직히 반성해야 해요. 젊다는 거 외에 국민들에게 뭘 제시하지 못했어요. 5년 전만 해도 ‘젊은 사람이 정치를 해야지’라면서 ‘그래서 네 대안이 뭔데’라고 묻지 않았거든요. 청년 정치라는 말의 시효가 다 한거죠.
하지만 청년정치를 시장의 볼거리처럼 만든 기성 정치의 책임도 있어요. 얼마 전 유시민 작가가 ‘청년정치라는 농담’이라는 글을 썼는데, 과도한 비판이라고 생각했어요. 청년 정치인이 역량이 없다는 얘기였는데, 그럼 기득권 정치라는 불행은 어떤가요? 청년정치가 반성해야 하는 건 맞지만, 이런 규정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지금의 정치 상황에서 청년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은 있어요.”
그렇다면 반전도 청년이라는 키워드 없이 의제에 집중할 수도 있지 않나요?
“수료 후 수강생들이 낸 성명문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지금까지의 청년정치를 거부한다. 나이가 어린 것만으로 새로움을 강조하거나 기득권의 선거용 들러리로 스스로를 세우지 않겠다. 대신 청년정치라는 이름에 걸어주셨던 희망과 기대를 복원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겠다.’ 지금의 청년정치를 반복하자는 의미에서 청년을 내세우는 게 아니에요. 수강생들에게 그런 진심이 있는 거죠.”
선출직 정치인 배출을 목표로 두고 계신데, 반전에 공천권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수료생들이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수료생을 포함해 정치 개혁에 관심 있는 분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계획하고 있어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다양한 정치적 성향의 수강생들이 합의와 소통을 경험한 게 가장 의미있는 결과라고 생각해요. 이게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이죠. 정당이 청년을 들러리로 세우지 않으면서 인재를 키우는 교육 과정을 제대로 운영하고, 그들 중 역량이 있는 사람에게 공천을 주도록 변한다면 저희가 존재할 이유가 옅어지겠죠. 그러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저희 몫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전과 수료생들은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요?
“브랜드북을 준비하고 있어요. 반전 1기가 끝났으니, 저희 활동과 지향점을 잘 묶어보고 앞으로 나아가야죠. 수료생들의 정치적인 고민과 이야기도 담아낼 거예요. 스튜디오 반전을 대안 문화 공간으로 꾸려가고 싶은 욕심도 있어요. 공연, 정치 행사, 토론회 등을 열 거예요. 연사를 불러서 강의 듣고 박수 치는 걸 넘어서, 수료생들이 돌아가면서 호스트를 맡는 식으로요. 6개월간 쌓은 고민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지도 구체화 해 나가려고 합니다.”
정치가 변화하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우선 애증의 정치클럽을 포함해서 다양한 정치 스타트업들이 등장해 반가워요. 지난해 지방의회 정책지원관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지방의회에서 활동하는 개인들도 많아졌고요. 정치가 직업 분야의 하나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그리고 요새 젊은 비서관들이 많아지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정치권 문화가 바뀌고도 있어요. 이런 변화에 반전이 불을 붙이고 싶어요.”
배강훈 디렉터와의 대화는 반전을 설명하는 단어들에 대한 탐구로 돌아왔습니다. ‘청년’과 ‘정치’. 무거운 단어지만 그의 입에서는 저녁 메뉴를 말하듯 가볍게 나왔습니다. 그는 이 단어들을 가깝게 느끼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려면 자주 만나야 하고, 얼굴을 맞대야 합니다. 정치학교 반전이 대면 수업을 고집하는 이유입니다. 비대면의 시대에 우리가 겪었던 결핍은 정치에서 유독 더디게 해소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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