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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구의 30년, 일본의 30년

이삭
이삭
- 19분 걸림 -

《팝콘폴리틱스》
영화나 드라마에 나타난 정치적 배경을 ‘덕력’ 넘치는 시각으로 파헤쳐보는 코너입니다. 팝콘 한 봉지 뜯으면서, 아니면 맥주 한 캔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정치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일본에는 오랜 기간 방영된 애니메이션들이 많다. 일본에서 현재 방영 중인 애니메이션 중 가장 오래된 시리즈인 〈사자에상〉 시리즈는 1969년부터 지금까지 50년이 넘게 방영되고 있다. 〈도라에몽〉은 1979년, 〈날아라 호빵맨〉은 1988년 방영을 시작했다. 이들 애니메이션 시리즈에는 그 애니메이션이 처음 만들어졌던 시기의 흔적이 녹아있다.

일본의 여러 애니메이션들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익숙한 것은 아마도 1992년 방영되기 시작한 〈짱구는 못말려〉 시리즈일 것이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짱구는 전혀 나이를 먹지 않았는데, 짱구가 살고 있는 일본은 그동안 얼마나 달라졌을까?

기술이 발전하고 많은 일상생활이 달라졌겠지만, 지표 상으로 볼 때 일본의 30년 전과 지금은 신기할 정도로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의 일본인들은 30년 전 자신의 부모들이 받았던 월급과 거의 비슷한 액수의 월급을 받고 있고, 30년 전의 집권당이던 자유민주당은 여전히 일본 의회를 장악하고 있다. 〈짱구는 못말려〉를 통해 일본의 30년을 읽어봤다.

짱구 가족 얼마나 잘 살까?

〈짱구는 못말려〉를 보고 자란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자, 인터넷 상에서 실질적인 짱구 가족의 경제적 수준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가장 관심을 받는 부분은 부동산과 관련된 이야기다. 짱구 아빠는 매일 쥐꼬리 같은 월급이라며 한탄하곤 하는데, 짱구네 가족이 그럴듯한 2층짜리 주택을 갖고 있는 걸 보면 사실 제법 잘 사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곤 한다.

짱구 가족. ⓒ짱구는 못말려 애니메이션 갈무리

짱구 가족의 경제적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작품 내에서 언급되는 내용을 보면 대충은 알 수 있다. 짱구 가족은 35년 만기 장기 융자로 집을 마련했다고 한다(일본에서는 비교적 흔한 주택 마련 방법이다). 짱구네 집은 2층짜리 단독주택이고, 도쿄 도심에서 약 50km 떨어진 위성도시 ‘카스카베 시’에 위치해 있다. 한국 수도권으로 따지자면 화성 동탄이나 파주 운정 같은 신도시에 있는 셈이다. 짱구 아빠 신형만 씨는 승용차를 갖고 있지만 매일 전철을 이용해 출퇴근하고 있다.

한편 짱구 가족의 1년 수입은 어느 정도일까? 작중 설정 상 신형만 씨는 도쿄에 있는 한 상사의 계장급 직원이다. 작품 내에서 언급되는 것을 보면 신형만 씨의 월급은 30만 엔 정도인데, 이런 저런 수당을 더 받게 된다면 1년에 400만 엔 정도는 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의 일본인의 평균 급여가 약 425만 엔이니, 조금 적지만 30대 중반의 직장인임을 감안할 때 평균적인 일본 직장인 수준의 급여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엄밀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정리해보자면 짱구네 가족은 수도 근처 위성도시에 35년 만기 대출을 끼고 구한 단독주택에 자가용 한 대가 있고, 연 4,000만 원 정도의 수입을 벌고 있으며, 반려견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는 4인 가족이다. 아주 넉넉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가난하지도 않은 수준이다. 대략적으로 짱구 가족은 90년대 초반 일본에 거주하는 서민의 모습을 묘사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버블은 못말려

그렇다면 현재 일본 직장인들의 일 년 수입은 어느 정도일까? 시간이 지났으니, 짱구 아빠의 월급이 오르지 않았을까? 30년이 지난 2021년 일본 근로자들의 평균 연봉은 443만 엔이다. 놀랍게도 30년 전과 비교해 거의 변화가 없다. 일본인들의 평균 연봉은 1997년 467만 엔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09년에는 406만 엔까지 하락했다가 현재 425만 엔 정도로 회복하며 비슷한 수준을 맴돌고 있다. 방영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작중에 나오는 짱구 아빠의 월급 액수를 굳이 수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1990년부터 2021년까지 일본 민간부문 근로자의 1년 급여 변화. 30년 동안 오르내리기를 반복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같은 기간 한국 근로자의 연간 수입은 3배 증가했고, 독일 근로자의 한 달 급여는 2배 올랐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자. 고용노동부 자료를 근거로 계산한 한국 근로자의 평균 연봉은 1993년 약 1,148만 원에서 2022년 4,630만 원으로 상승했다. 물론 1990년 한국은 개발도상국에 가까웠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독일만 봐도 전업근로자의 평균 한 달 임금은 1992년 2,003유로에서 2001년 4,100유로까지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이를 감안하면 일본의 근로 소득이 30년 간 신기할 정도로 변하지 않았다.

이처럼 성장이 정체된 90년대 이후 일본의 시간을 ‘잃어버린 30년’이라 부른다. 사실 1980년대까지 일본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수출이 어려워지면서 일본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금리를 대폭 낮춰서 경기 부양을 시도했다. 금리를 낮추면 돈을 빌리기 쉬워지고, 그만큼 투자가 활성화된다. 일본 정부가 의도한 바도 이것이었다.

그런데 시장에 풀린 돈이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으로 몰리면서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폭등했다. 이른바 ‘거품경제’ 혹은 ‘버블경제’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거품 경제가 한창이던 시절 일본 황궁 부지를 팔면 미국 캘리포니아 주 전체를 살 수 있다는 말이 떠돌았고(캘리포니아 면적은 한반도의 1.9배다), 1988년 세계 시가총액 상위 50개 기업 중 33개가 일본 회사였다. 그 중 1위는 우리나라의 KT에 해당하는 통신사 NTT였는데, NTT의 기업가치($2,768억)는 2위인 IBM($7,605억)의 3배에 달했다. 이쯤 되면 그냥 대단한 수준이 아니라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집값이 너무 비싸지자 대도시 주민들은 주택 마련을 포기하는 판국이었다.

결국 거품이 잔뜩 낀 경제를 진정시키기 위해 일본 정부는 90년대 들어 낮췄던 금리를 크게 올리고 부동산 대출을 규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거품이 너무 빨리 꺼졌다. 주식 가격과 부동산 가격이 짧은 기간에 폭락하기 시작했다. 1989년 38,915로 최고점을 찍었던 닛케이 지수는 1992년 16,000 밑까지 떨어졌다. 빚 내서 산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자 기업들은 돈을 갚을 수 없게 됐다. 1993년 일본에서 상환되지 못하던 부실채권 규모만 34조 엔에 달했다. 당시 환율(100엔 당 700원 수준)로 계산해도 200조 원이 넘는다.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한 금융기관들은 새로 대출을 내주지 않았고, 경기는 계속 얼어붙었다. 일본은 이 부실 채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다. 10년은 20년이 됐고,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일본 경제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정부의 숱한 노력에도 꺼진 장작처럼 식어버린 일본 경제는 다시 타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짱구 가족이 살고 있는 2층 주택. 일본 사이타마현 카스카베 시에 있다는 설정이다.

〈짱구는 못말려〉 시리즈는 잃어버린 30년과 함께 시작했다. 실제로 짱구 가족이 집을 구매한 80년대 말 일본의 전국 평균 지가는 ㎡당 약 48만 엔(1991년)으로 최고치를 찍었지만, 2022는 19만 엔으로 떨어졌다. 한편 짱구 가족이 살고 있는 카스카베 시의 ㎡당 평균 지가도 1990년 29만 엔에서 2022년 9만 8천 엔까지 떨어졌다. 35년 융자로 어럽게 이자를 내며 마련한 집의 가치가 3분의 1 수준으로 크게 떨어졌으니, 요즘 말로 ‘고점에서 물렸다’고 하겠다.

55년 체제부터 아베노믹스까지

오랜 기간 경기 침체를 겪고 있는데, 한국 같다면 ‘정권 심판론’이 대두돼서 몇 번씩 정권을 갈아치웠을 일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일본에서 그런 정권 교체는 없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의 집권당은 자유민주당이다. 1955년 창당 이래 자민당이 정권을 내준 것은 단 두 번 뿐으로, 두 번의 기간을 합쳐도 자민당이 정권을 놓친 시기는 5년 8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버블경제 붕괴로 90년대 이후 오랜 시간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있는데도 자민당의 집권은 계속되고 있는 무엇일까?

사실 자민당이 지지를 받는 주된 이유가 경제다. 1955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의 경제 성장으로 일본은 선진국으로 부흥하는데 성공했고, 그 정치적 수혜를 자민당이 가져갔다. 자민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동안 자민당을 대체할 야당들이 성장하지 못했다. 전통적 야당이던 사회민주당(옛 사회당)은 현재 원내 1-2석을 겨우 가져갈 정도로 세력이 작아졌고, 사회당에서 갈라져나온 민주당은 여러 번 쪼개지고 합쳐지며 무게감을 키우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민당 자체가 워낙 다양한 성향의 파벌들을 갖고 있는 빅 텐트 정당이라, 여론이 나빠지면 자민당 내 다른 파벌이 집권할 뿐 자민당 집권 자체는 유지되는 식이다.

사실 버블 붕괴 이후 정권 교체가 일어나긴 했다. 일본은 의회 다수당 대표가 내각을 구성하는 의원 내각제 국가인데, 1993년 일본 총선에서 자민당을 제외한 7개 당이 연합해 55년 이후 최초로 비자민당 내각이 수립됐다. 그러나 소수 정당들이 힘을 모아 자민당의 의석률을 겨우 넘겼을 뿐, 당시에도 자민당의 의석 비율은 40%가 넘었다. 결국 1년도 지나지 않아 연립내각은 붕괴하고, 자민당은 사회당을 끌어들여 연립내각을 수립했다. 이후 1996년에는 총리 자리를 탈환한다.

2000년대 이후 일본의 경기 침체가 계속되자,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은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일본 경제의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경기 침체를 근본적으로 해소하지 못한 채 실업률과 빈부 격차가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고, 결국 2009년 총선에서 자민당은 민주당에 원내 과반을 내줘야 했다. 현재까지 자민당이 아닌 다른 당이 원내 과반을 차지한 유일한 사례다. 하지만 민주당 내각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 발생 후 2012년 다시 자민당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이 때 총리직에 오른 게 바로 아베 신조다.

역대 최장 기간 일본 총리로 재임한 아베 신조. 2012년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한 아베 신조는 '아베노믹스'라고 불리는 경기 부양 정책을 펼쳤지만, 성공적이었는지를 두고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아베는 취임 후 경기 부양을 위해 돈을 찍고 재정지출을 늘렸다. ‘아베노믹스’라고 불리는 경제 정책이다. 일본 정부가 돈을 풀자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환율이 올랐다. 외국에서 일본 물건을 똑같은 액수의 달러를 받고 팔아도 엔화로는 돈을 더 남기게 된 것이다. 주가지수인 닛케이지수는 아베 정권에서 3배 가까이 올랐고, 실업률도 크게 떨어졌다. 아베는 이런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일본 역사상 가장 긴 8년 동안 총리로 재임했다.

겉보기에는 꽤 잘 한 것 같다. 과연 실제로 일본인들의 삶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위에서 살펴봤듯, 일본인들의 실질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았다. 일자리가 늘기는 했지만,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훨씬 많아졌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2020년 일본 근로자의 38%가 비정규직이다. 별로 나아진 게 없다는 이야기다.그러는 사이 성장률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오히려 정부 지출을 늘리면서 국가 부채는 1경 2300조 원까지 증가했다. 이게 얼마나 큰 돈이냐면, 현재 일본 정부는 국채 원리금을 값는 데만 한 해 24조 엔(약 230조 원)을 쓰고 있다. 일본 정부 일 년 예산의 약 25%이다. 아베노믹스가 성공했다고 평가받기 어려운 이유다. 결국 2020년 아베는 총리직을 내려놔야 했다.

2022년 미국이 연달아 자이언트 스텝을 밟으면서 금리를 올리자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이 연달아 금리를 올렸지만, 일본만은 금리를 올리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 그래도 선진국 중에서 성장률이 가장 낮은 일본이 기준금리마저 인상하면 경기가 더 얼어붙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무엇보다 금리를 1% 올릴 때마다 정부의 원리금 부담액이 수십 조 원 가량 늘어난다는 점도 부담이다. 대신 일본은 미국보다 낮은 금리 때문에 환율이 오르자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풀어 환율을 방어하고 있다.

87년생 신짱구, 세상을 달관하다

짱구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짱구는 5살이다. 만약 나이를 먹었다면 30대 중후반, 작중의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다. 현실에서 87년생 짱구라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8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난 일본의 신세대를 가리키는 말 중 ‘사토리 세대’라는 말이 있다. ‘사토리’란 일본어로 ‘달관’ 또는 ‘득도’라는 뜻으로, 사토리 세대는 자가용이나 주택 소유 등 물질적 욕망을 가지지 않고 연애나 결혼, 연애를 포기하는 성향을 보이는데, 즉 ‘적당히 살자’는 삶의 태도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두됐던 ‘N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취직 등 N개의 목표를 포기하는 세대)’와 비슷한 현상이다.

사토리 세대는 열심히 돈을 벌어 집을 사고 빚을 갚아도 더 잘 살게 될 것이란 희망을 갖지 않는다. 도쿄는 아니지만 근교 위성도시에라도 2층짜리 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짱구네 가족을 보고 ‘제법 잘 산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지만, 일본에서 지금 집을 마련하기가 유달리 어려운 편도 아니다. 일본의 대출 금리는 매우 낮은 편이고, 도쿄 도심의 아파트 가격도 약 8억 원 수준으로 서울 아파트 가격 평균인 12억 원의 2/3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심히 돈을 모아서 집을 마련해도 자산 가치 상승을 기대하기 어렵고 오히려 가격이 떨어질 것이란 예측이 많다. 지난 30년 동안 집값이 계속 하락해오지 않았는가? 이에 따라 성장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가 위험을 감수하며 무언가를 성취하기보다는 당장의 상태에 안주하길 선택하는 사토리라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바로 귀엽고 천진난만한 어린이 짱구와 친구들 세대에서 말이다.

1995년 5,500조 달러에 달했던 일본의 GDP는 2012년 6,273조까지 상승했다가 현재 4,937조에 머무르고 있다. 그 사이 중국은 일본을 앞지르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한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에서 일본을 턱밑까지 따라잡았다.

그래서일까? 일본인들이 고도성장기이던 80년대에 대한 향수를 매우 짙게 느낀다는 이야기가 많다. 2001년 출시된 영화판 〈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에서는 20세기로 시간을 되돌리려는 악당의 음모에 맞서는 짱구 가족의 이야기가 줄거리인데, 빠르게 성장했던 80년대 고도성장기에 대한 일본인들의 향수를 묘사하고 있다. 1992년이라는 시간에 얼어있는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의 의미는 그 점에서 남다른 듯 하다.

글: 에디터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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