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장악의 역사
언론을 장악하려는 정권 vs 그에 저항하는 언론의 단순한 구도가 반복됐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언론장악 시도가 반복된다는 얘기, 들어보셨나요?
야당에서 윤석열 정부의 언론정책을 두고 언론장악 시도라는 비판이 나오자, 정부여당은 문재인 정부의 언론장악이 더 심각했다며 당시 사건을 먼저 조사해야 한다고 대응했습니다. 야당은 윤석열 정부는 언론장악이 심각했던 이명박 정부 당시 언론 관련 인사들을 그대로 데려와 그 심각성이 훨씬 크다고 반박했는데요.
우리나라 언론과 정치의 관계는 복잡합니다. 우선 언론을 장악하려는 정권 vs 그에 저항하는 언론의 단순한 구도가 반복됐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언론은 분명 정치권력이 행한 탄압의 희생자였지만, 정권을 쥐락펴락할 정도의 권력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언론에서 ‘언론 장악’이라고 비판해온 정책이 정말 억압인지, ‘언론 재벌’의 걸림돌인지도 잘 구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정치권의 이해관계도 반영됩니다. 같은 정당이어도 여당일 때와 야당일 때 언론정책에 대한 태도가 바뀌곤 했습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근본적 정치 탐구>에선 언론장악의 역사를 탐구해보겠습니다.
보도지침부터 언론 민주화까지
박정희, 전두환 정부는 적극적으로 언론을 탄압했습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은 강제 해직시켰고, 보도 내용에도 일일이 개입했습니다. 그 결과 당시 언론사는 사실상 정부와 통합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구체적인 정책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 정부
- 프레스카드제: 정부가 언론인 자격을 심사, 허가하는 제도입니다. 기자의 신변을 파악해 감시체제를 마련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시행 3개월 만에 전국 기자의 32.3%가 프레스카드를 발급받지 못해 기자직을 그만두게 됐습니다.
- 언론통폐합: 지방언론을 중심으로 언론통폐합을 실시했습니다.
- 협조의뢰: 협조의뢰라는 이름으로 사실상의 보도지침이 내려졌습니다. 민주화 운동 보도를 삼가고, 베트남 전쟁을 작게 보도하라는 등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방송의 경우 유신체제와 새마을운동 홍보에 적극 동원됐습니다.
전두환 정부
- 언론통폐합 : 전두환 세력 집권 직후인 1980년, 언론 통제를 위해 총 44개의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1000여명의 언론인을 강제 해직시켰습니다.
- 방송통폐합·공영화: 방송의 공공성 보장을 명목으로 KBS에 다수 방송사를 흡수통합시키고, MBC의 주식 65%를 KBS가 인수하게 했습니다. 사실상 KBS가 모든 방송을 통제하는 구조였습니다.
- 보도지침: 가장 핵심적인 언론 통제 방법이었습니다. 보도지침의 주된 내용은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비판,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정보, 미국 등 서방 우호국들의 민주화 요구를 보도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을 골라내는 것 외에도 어떤 기사를 더 ‘눈에 띄게’하거나 ‘크지 않게’하라는 등 세부적인 지시사항이 있었습니다. 보도지침의 존재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1986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기관지 『말』에서 발간한 보도지침 특집호를 통해서였습니다. 공개된 보도지침 중에서 경찰이 여대생(현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에게 성고문을 가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은폐하라는 내용이 큰 충격을 불러왔습니다.
- 언론기본법: 전두환 정권에서 공포한 법안으로, 정부가 내린 보도지침을 지키지 않은 신문사의 등록을 취소할 수 있게 하는 내용입니다. 보도지침을 지키지 않은 기자는 정보기관에 연행돼 고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시행 결과 언론사의 보도지침 이행률은 70%에 달했습니다.
두 정권은 협조적인 언론에게는 보상을 제공했습니다. 이는 언론의 기업화와 국가에 대한 언론의 의존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언론통폐합은 법으로 정해진 ‘시설 기준’ 에 따라 이뤄져, 애초부터 규모가 크고 자본을 갖춘 언론사가 주로 살아남았습니다. 이들은 독점체제를 구축해 이익을 보장받았고, 정부로부터 각종 특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몸집을 키운 언론은 갈수록 기업화, 보수화됐으며 경제적으로 정부에 의존하게 됐습니다.
민주화 이후, 노태우 정부에선 언론기본법이 폐기되며 새로운 언론사가 대거 등장했고, 일부 언론사의 독점체제가 풀렸습니다. 갑작스러운 자유경쟁체제에서 신문사들이 택한 생존 전략은 자본 투자였습니다. 언론사의 이윤 추구가 극대화됐고, 광고주의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노태우 정부에서 언론이 완전한 자유를 되찾은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언론사 시설 기준이 있었고, 발행정지의 권한이 행정부에 있었습니다. 언론인들과 개별로 접촉해 기사 삭제와 뉴스순서 조정을 우회적으로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언론 자유와 함께 시작된 ‘기싸움’
언론사가 다양해지고 자율성이 높아지면서, 각 언론사가 정권 전체가 아닌 특정 정치세력과 가까워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 언론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졌고, 언론은 이 권력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정경유착을 막고 언론 권력을 통제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일부 언론사는 이를 ‘언론탄압’으로 규정하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의 집중적 비판 보도는 정부 지지율을 흔들어 국정 동력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김영삼 정부
- 정치권력과 언론의 유착을 비판하며 개혁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언론사주의 재산공개를 요구했으나 일부 공영방송사만이 응했고, 신문 발행부수 공개 요구는 조사 신뢰성 문제로 무산됐습니다. 주요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최초로 실시했지만 결과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정부
- 통합방송법을 제정해 방송의 독립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KBS의 예결산 승인을 정부가 아닌 국회에서 받도록 하고, 대통령이 KBS 사장을 해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남았고, 이는 현재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 김대중 정부 역시 언론사 세무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전 정부와 달리 조사 결과를 발표했고 약 2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탈세 혐의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신문사 사장들을 구속하기도 했습니다. 보수언론은 이를 두고 선거를 앞두고 이뤄진 ‘언론 길들이기’라고 비판했습니다.
- 세무조사 이후 보수언론은 김대중 정부를 강하게 공격했고, 그 결과 대통령의 가족 비리 의혹 등이 보도되며 정부의 지지율이 급속히 떨어졌습니다.
노무현 정부
- 임기 초부터 특정 언론이 시민과 정부 위에 있다며 보수언론을 노골적으로 비판했고, 이는 임기 내내 지속된 보수언론과의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 강력한 언론정책도 논란이었습니다. 신문사의 시장점유율을 제한하는 신문법, 언론사의 고의 과실이나 위법성 없이도 정정보도를 청구할 수 있게 한 언론중재법, 정책 오보에 반박하고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자체 매체 ‘청와대 브리핑’ 등이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신문법과 언론중재법에 대해 위헌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신문법의 일부 조항에 위헌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으나, 취지와 목적을 대체로 인정했습니다.
다시 돌아온 전략적 언론장악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독재정권과 유사한 직접적 언론 통제의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때부터 주요 언론사 간부들의 성향 파악을 지시했습니다. 집권 후엔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최시중을 방송통신위원장으로 임명하고, KBS, MBC, YTN 사장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반발한 여러 언론인들이 해직 또는 징계 처분을 받았습니다. 정권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은 폐지하거나 진행자를 하차시켰습니다.
- 당시 국가정보원은 공영방송의 보도 내용에 관여하고, 방송장악 전략을 총괄 기획했습니다. 국무총리실은 언론사를 불법사찰해 신상을 파악했습니다.
- 2012년 사상 최장 기간의 언론 대파업이 벌어지며 이명박 정부의 언론 통제는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집권한 박근혜 정부가 다시 공영방송 인사에 개입하면서 언론 장악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 공영방송 이사회에는 극우 인사들이 선출됐고, 그 결과 KBS에서는 정부가 낙점한 길환영 사장이 세월호 보도에 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안종범 당시 청와대 경제 수석의 업무수첩에서 '시스템적으로' 정부 비판적 언론에 문제를 제기하고, '불이익을 줘야 한다'는 내용이 발견됐습니다.
-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는 당사자 민원 없이도 인터넷상의 명예훼손성 게시물을 삭제할 수 있게 하는 규정 개정을 추진했습니다. 정부 비판적인 게시글을 방심위 직권으로 통제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 2016년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는 전세계 70위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2002년 국경 없는 기자회가 통계 조사를 시작한 이후 한국이 받은 최저 순위로, '문제 있음' 수준으로 분류됐습니다.
이처럼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언론통제는 방송에 집중돼있었습니다. 공영방송 간부를 친정부 인사로 교체하고, 방송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정부에 비판적인 PD들을 관리했습니다.
또한 종합편성채널을 개국하는 동시에 신문사의 방송사 소유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는 자본을 갖춘 보수 언론에게 유리한 조치였습니다. 실제로 현재 종편 채널의 사업자는 모두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신문사입니다.
이명박 정부부터 정치와 언론의 힘겨루기는 공영방송 장악을 중심으로 전개됐습니다. 공영방송을 통한 ‘정치보복’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뤄졌다고 얘기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 원인은 정치권과 결탁된 공영방송 지배구조에 있습니다.
<근본적 정치 탐구> 언론장악 편 2부에서는 공영방송을 중심으로 이명박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까지의 언론장악 논란을 살펴보고, 공영방송 구조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주언(2008). 한국의 언론통제. 리북
[논문]
金海植. (1992). 언론에 대한 국가개입의 구조 및 그 전개과정. 언론정보연구, 29, 23-53.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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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춘 외. 실록 민주화운동 (65)‘말’ 의 보도지침 폭로. 경향신문. 2004. 07. 25. https://www.khan.co.kr/article/200407251849071. 2023. 10. 10.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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