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 파벌의 궤적
80년대에 패인 진보정치 파벌의 물줄기는 여전히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80년대, 진보정치 세력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진단할 지를 두고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NL과 PD의 대립으로 대표되는 일명 사회구성체 논쟁입니다.
어떤 해석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파벌이 형성되었고, 이 구도는 민주화 후 본격적인 진보정당의 구성에도 반영됐습니다. 90년대 들어 사회구성체 논쟁이 급격히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요.
현재의 진보정당도 마찬가지입니다. 80년대에 패인 진보정치 파벌의 물줄기는 여전히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형태는 달라졌지만요.
<근본적 정치 탐구> 진보정치 시리즈 마지막 편에서는 그 흔적을 살펴보려 합니다.
<근본적 정치 탐구> 진보정치 시리즈
90년대의 변화
90년대, 운동권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한국의 정치적·경제적 체제가 완전히 달라지면서 운동의 환경이 바뀌었습니다.
- 1987년 민주화가 이뤄지며 운동의 동력이 약해졌고, 대중과의 접점도 줄었습니다.
- 소련, 동유럽의 공산권 붕괴로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가 커졌습니다.
-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금융시장 개방, 노동시장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행됐습니다.
이를 겪으며 진보 정치 세력의 정치적 노선은 조금씩 변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처럼 진보 정치가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이 출현하기도 했습니다.
80년대 운동의 핵심 이론과 전략은 흐려지고, NL은 통일, PD는 노동 중심이라는 틀만 남았죠.
하지만 각 파벌의 문화와 규범은 굳건했습니다.
- NL: 실천 중심, 수직적 구조, 최대한의 연대 추구
- PD: 이론 중심, 민주적 구조, 연대에 신중
NL과 PD의 구도는 80년대와는 다른 그림이 됐지만, 그 틀과 각 파벌의 문화는 진보정당의 형성과 분열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 지붕 두 가족
90년대는 본격적인 진보정당 창당이 시작된 때기도 합니다.
- 진보정당 운동을 주도한 건 PD였습니다. 민주화 후 PD는 김대중, 김영삼 등으로 대표되는 민주진영과 차별화된 독자적 정치세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 한편 NL 다수는 진보정당은 시기 상조이며,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우선 다양한 세력을 모아 민주정부를 세운 다음 통일을 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노태우 정부의 탄압으로 NL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됐고, 김대중은 대선에서 연이어 패배했습니다. 현실 앞에서 NL은 진보정당 운동에 합류했습니다.
- 그 결과 1998년 대선을 앞두고 창당된 건설국민승리21에서 두 세력이 함께 첫 선거를 겪었고, 이후 민주노동당(민노당)이 탄생했습니다.
즉, 운동권의 두 세력은 목표와 이념을 합의하지 않은 채로 정당 운동을 함께하게 됐습니다. 민노당은 창당 단계부터 잠재적인 이념 갈등을 품고 있었던 것이죠.
민노당은 자주파(NL)와 평등파(PD)로 나뉘었고 당내 주도권을 잡기 위한 두 파벌의 갈등이 계속됐습니다.
- 자주파: 끈끈한 조직, 수직적 분위기, 단일한 모임, 통일 중심, 친북 성향, 민주당계 비판적 지지
- 평등파: 느슨한 조직, 민주적 분위기, 다양한 모임, 노동 중심, 종북 비판, 독자 노선 추구
자주파는 내부 결집이 강한 만큼 조직 동원에 능숙했습니다. 80년대 NL이 운동권 내 다수파였던 것도 이런 문화 덕분이었습니다. 창당 공신은 평등파였지만, 자주파는 당내 선거에서 각종 수단을 동원해 평등파를 앞섰고 당내 주류가 됐습니다.
여기서 기억해두면 좋을 이름들이 있습니다. 자주파의 지역 단위 하위 파벌인 경기동부연합, 인천연합, 울산연합입니다. 이들은 이후의 진보정당에서도 핵심적인 NL 파벌로 지속됐습니다.
민노당은 2004년 총선을 제외하면 줄곧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패배 책임을 두고 파벌 갈등은 더욱 거세졌고, 2008년 평등파 의원들(노회찬, 심상정)이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하며 민노당은 찢어졌습니다.
이 과정은 통합진보당(통진당)에서도 반복됐습니다.
통진당은 2011년 이명박 정부에서 창당됐습니다. 진보 세력은 이명박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뭉쳐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통합진보당이 창당됐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무색하게 진보 세력 내 갈등은 여전했습니다. 참여정부 계열도 합류해 사실상 한 지붕 세 가족이었죠.
통진당의 파벌 싸움은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갈등으로 전개됐습니다. 이때 NL 계열도 분열됩니다.
- 당권파: 경기동부연합(NL), 광주전남연합(NL)
- 비당권파: 인천연합(NL), 민주노총국민파(NL), 평등파(PD), 참여정부계
두 파벌은 대북관 충돌, 정규직-비정규직 갈등, 세력싸움 등 민노당에서의 파벌 갈등 양상을 반복했고 결국 부정 경선과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새로운 실험, 선거연합정당
‘현실 정치’를 이유로 진보 세력을 통합하려던 두 번의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통진당 이후 10년, 각 파벌들은 각자의 정당을 만들어 고군분투해왔습니다.
- 정의당: 통진당 비당권파 일부가 2012년 탈당해 창당했습니다. PD 계열와 온건 NL로 구성됐습니다.
- 민중당-진보당: 통진당 해산 후, 경기동부연합, 인천연합, 울산연합 등 NL 계열이 창당했습니다.
NL과 PD의 문화 차이는 두 정당의 규범과 조직 구성에도 남아있습니다.
- 정의당은 크게 PD 계열과 온건 NL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민노당 평등파처럼 구체적인 가치 지향에 따른 다양한 하위 파벌이 있습니다. 지금은 대다수가 탈당했지만 참여계도 있었습니다.
- 진보당은 NL 계열의 강점인 조직력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2022년 지방선거에서 21명 당선이라는 성과를 냈죠. 같은 해 당원 수도 정의당의 2배를 넘어섰습니다.
민노당과 통진당에서의 대립을 생각하면 정의당과 진보당이 손을 잡긴 어려울 것 같죠. 하지만 올해 총선을 앞두고 또 다시 진보정당의 통합이 얘기됩니다.
- 정의당은 선거연합정당을 주장합니다. 정의당을 플랫폼으로 해 인지도를 확보하고, 선거 후 다시 쪼개지자는 겁니다. 민주당과의 연합에는 신중한 태도입니다.
- 진보당은 민주노총와 시민사회의 참여를 포함한 최대진보연합으로 새로운 정당을 만들자는 입장입니다. 민주당과의 연합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진보연합의 근거 역시 통진당 때와 동일합니다. 윤석열 정권 심판이죠. 이전의 실패를 돌이켜 볼 때, 민주당과의 차별화를 중시하고 선거 이후 분당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은 다릅니다.
흥미로운 건 정의당 내에서 선거연합정당에 대한 의견이 파벌에 따라 갈린다는 건데요.
- 선거연합에 찬성하는 파벌은 온건 NL 출신인 인천연합, 광주전남연합, 함께서울과 PD 계열인 전환입니다.
- 현재 해산한 대안신당 당원모임과 최근 금태섭 전 의원의 신당 새로운선택에 합류한 세 번째 권력은 선거연합정당을 비판했습니다.
- 한편 진보정당의 이합집산을 모두 지켜본 심상정 의원은 독자적인 파벌로 이야기됩니다. 아직 선거연합정당에 대해 의견을 내지 않았습니다.
선거연합정당 형식은 이번 달 내로 확정될 예정입니다. 정의당은 진보정당들에게 다음 주까지 참여 결단을 내리길 촉구했습니다.
애정클이 만난 정의당 관계자 A씨는 진보정당 내 차이가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거대양당의 계파는 인물 중심입니다. 하지만 진보정당의 계파는 가치를 기준으로 형성됐습니다. 이는 개성있고 민주적인 정당이 되려면 꼭 필요한 조건입니다. 가치 경쟁과 의제의 정교화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조직에서는 아무리 좋은 가치를 쫓더라도 그 빛이 바랠 수 있습니다. 자기 파벌의 승리를 위해 구성원들의 헌신을 요구하고 잘못을 묵인할 수도 있죠. 잘못된 방식으로 권력을 휘두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척박한 정치 지형에서 진보세력은 조직을 보호하고 구성원의 자리를 만드는 데 전념해 왔습니다. 각 파벌이 친 울타리도, 그것을 지키는 일도 오래됐습니다. 어느 파벌이든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조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A씨는 이런 조직 문화가 진보정치와 대중의 거리를 더욱 벌렸다고 비판했습니다.
선거연합정당과 신당 창당은 울타리의 위치와 작동 방식을 모두 바꾸는 일입니다. 실험을 설계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변수는 넘쳐납니다. 과연 이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을까요?
참고자료
[단행본]
정영태. (2011). 파벌: 민주노동당 정파 갈등의 기원과 종말. 이매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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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웅. [정의당-진보당 대표 대담] “정의당 플랫폼, 최적의 경로” “노동자 플랫폼으로 진보정당 모아야” 2024. 01. 08.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9165 매일노동뉴스. 2024. 01. 08. 접속
조윤영. 다시 일어선 진보당, 지역·생활 밀착 통했다. 2022. 06. 12.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046688.html 한겨레. 2024. 01. 08. 접속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022년도 정당의 활동개황. 2023.11.28. https://www.nec.go.kr/site/nec/ex/bbs/View.do?cbIdx=1129&bcIdx=195209 2024. 01. 08.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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