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고 멋진 정치가 유독해질 때
《팝콘폴리틱스》는 문화콘텐츠에 나타나는 정치적 배경을 ‘덕력’ 넘치는 시각으로 파헤쳐보는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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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냐?”라는 중요한 질문
현대 정치는 공동체와 괴리되어 있다는 비판에 직면합니다. 청년은 만연한 개인주의로 인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죠. 저는 오늘날을 살피기 위해 오히려 시간을 돌려보려고 해요. 우리의 자아가 협소하다는 의심은 히피 문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의 자아가 갑갑하다는 거죠. 하버드 대학교에서 티머시 리어리가 멕시코 원주민이 의식을 위해 복용하는 약초에서 힌트를 얻어, 영적인 길을 여는 LSD를 발명했습니다. 리어리는 LSD와 마약 문화의 시발점입니다. LSD는 히피 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됩니다.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도 신비주의에 깊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헉슬리의 <지각의 문>은 무의식의 개방을 다루고 있는데, 이는 히피 문화의 ‘경전’이 됩니다. 전설의 록 그룹 ‘도어즈’가 이 책에서 이름을 따왔고요. 반문화의 열풍은 강렬했습니다. 히피들은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열어 사랑과 평화를 외쳤습니다.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 솔로 연주는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미풍양속을 거부했어요. 결혼도 거부했고, 일부일처제도 거부했죠.
슈퍼스타들은 더욱 과격했죠. 동양문화를 배운다고 난리였습니다.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이 인도에서 악기 시타르를 배워오는 그런 시대였어요. 해리슨은 <서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에 시타르 연주를 넣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다종다양한 시도를 했던 건 ‘자아’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자아 너머의 내러티브는 우리가 뒤집어쓰고 있는 사회적 자아보다 충만한 내적 자아가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LSD와 음악은 자아의 깊숙한 내부로 하강하려는 수단이었습니다. 정치도 그에 맞는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서야만 했죠.
잘 알려진 것처럼 히피 문화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반전운동을 다룬 많은 영화들 중에 아론 소킨의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시카고에서 열린 대규모 반전운동 주동자 7명의 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위의 핵심 주동자는 톰 헤이든과 애비 호프만이었습니다. 호프만은 미디어를 통해 문화 혁명을 이뤄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고, 헤이든은 일단 자신들의 합법성을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당시 반전운동의 전설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문화혁명 하면 우리는 유럽의 68혁명만 생각하지만, 대중문화를 비롯해 미국의 반문화 운동도 생각보다 더 강렬했습니다.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던 밴드 ‘디보(Devo)’(한국 래퍼 디보가 아닙니다)도 반전운동과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디보의 멤버들은 켄트 주립 대학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1970년 켄트 주립 대학에서 일어난 발포사건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오하이오 주 방위군이 베트남전을 반대하던 학생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는데, 4명 이상 죽고, 9명이 부상당했어요. 디보는 묘한 코스튬을 입고 다소 난해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비단 록 밴드만 정치에 참여한 건 아니었습니다. <대부>, <택시 드라이버>, <이지 라이더>와 <잃어버린 전주곡>과 같은 명작을 제작한 영화제작사 BBS 프로덕션의 사장들은 요즘 말로 하면 ‘또라이’들이었습니다. 마약과 섹스로 방탕한 삶을 살았어요. <헐리웃 문화혁명>이라는 책을 보면 방탕한 삶이 잘 나와 있죠. BBS 프로덕션의 사장인 버트 슈나이더는 흑인 해방을 기치로 내건 ‘흑표당’이라는 반국가단체를 지원했습니다.
히피 운동은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었지만, 그 여파는 오래가지 않았어요. 가족과 기존의 공동체를 대신할 제도가 있을까요? 여러모로 정치적 운동으로 성장하기 어려웠던 듯싶습니다. 그럼에도, 마르쿠제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거두는 반문화 운동을 지지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소외상태에 빠트려 1차원적 인간으로 만들었는데, 반문화 운동은 거기서 해방되고자 한 것이죠. 사람들은 미디어와 자본주의가 감행한 타율적인 통제에 의해 감정과 생각이 조종되었습니다. 히피 운동은 그에 대한 저항을 보여준 겁니다.
히피들이 연 새로운 시대는 폭력조직 ‘헬스 엔젤스’가 롤링스톤스 콘서트에서 벌인 난도질과 ‘맨슨 패밀리’의 샤론 테이트 살해로 끝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평화와 사랑을 염원했던 반문화 운동에 잔혹한 폭력이 개입하면서 끝나버린 거죠.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번역하면 옛날옛적 할리우드에서)가 샤론 테이트 살해를 다루고 있습니다. 1970년대 영화의 광팬이기도 한 타란티노는 이 영화에서 1970년대라는 영화적 이행기를 다루는 동시에, 당시의 히피 문화를 비판적으로 조명합니다. 영화에는 맨슨 패밀리가 나오는데, 타란티노는 히피들을 멍청한 하룻강아지처럼 다루죠. 실제로 당시 지미 카터의 실패, 닉슨과 레이건을 위시한 보수 정치인의 약진으로 미국 사회는 훨씬 더 보수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되면 다루긴 하겠지만, 이 보수화된 시기에 출현한 영화들이 소위 말하는 미국의 공포 영화들입니다. 대히트를 쳤습니다. 혐오와 공포라는 감정이 본격적으로 영화 스토리에 들어갔다는 거에요. 이를 다룬 책은 <베트남 전에서 레이건까지>입니다. 작년에 개봉한 <탑건>에서 동성애 코드를 읽은 분들이 계셨죠? 이 책이 그런 분석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문화를 빼앗겼다!
사회가 보수화되었으니, 히피의 유산은 사라진 것일까요? 대안 정치의 꿈은 희한하게도 훨씬 더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바뀝니다. 70년대에 사이키델릭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남아, 새로운 방식으로 탐구되었던 것이죠.
이해하시기 편하게 도식적으로 설명드릴게요.
먼저 섹스입니다. 히피들은 가족 관계를 해체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섹스에 접근했고요. 성정치를 한발자국 더 전진시켰죠. 그런데 그런 상황이 섹스를 재화처럼 만들기도 했습니다. 요즘 말로 외모자본이라고 하죠. 섹스가 가족에서 분리된 건 좋아요.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 주류사회에서 일종의 자본처럼 거래됐습니다. 프랑스의 문제적 소설가 ‘미셸 우엘벡’은 섹스가 자본이 된 냉혹한 연애 시장을 다뤄요. <투쟁 영역의 확장>이라는 그의 데뷔작 제목이 상징적이죠. 여기서 말하는 투쟁 영역이 확장된 곳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엘벡이 발견한 지점은 섹스가 자본화됐고, 진정한 사랑은 발견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엘벡은 반문화가 만든 성의 시장화를 조롱하고 있어요. 그의 소설에는 전통적인 가족이 붕괴하는 바람에 불행해진 남자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다음은 마음이에요. 60년대에 히피들이 자아의 안팎을 탐구했다면, 70년대에는 영혼이 통계적인 수치로 정리됩니다. 기존의 영화들이 영혼의 근사한 초상화를 그리는 데 안주했다면, 데이비드 핀처의 <마인드헌터>에는 범죄자의 충동과 성욕을 하나의 '프로필'로 체계화하는 관료집단이 등장합니다. 범죄자들이 갖고 있는 ‘마음의 지문’을 찾아내 패턴화하는 것이죠. 프로파일러들은 직업, 성장과정, 어릴 적의 트라우마 등에 주목합니다. 이는 결정론적인 프레임에서 범죄자를 빼낸, 지극히 진보적인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나치의 우생학자들은 골상학이라고 해서 범죄자의 머리통 모양을 정리해서 범죄 가능성을 추측했었거든요. 사이키델릭이 마약과 음악을 통해 인간 영혼의 미개척지를 찾아나섰다면, 프로파일러들은 인간의 충동을 체계화했습니다.
이 드라마가 시작하는 대목도 재밌습니다. 제가 다른 글에서도 다뤘던 영화감독 시드니 루멧을 기억하시나요? <마인드헌터>는 주인공이 루멧의 <뜨거운 오후>를 보면서, 범죄자가 탄생한 사회적 환경에 주목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마인드헌터>는 여느 예술영화처럼 허세가 가득한 스타일을 취하지 않아요. <마인드헌터>가 다루고 있는 인간의 마음은 보이지 않고 추상적인 소재인데도 말입니다. 영혼을 가시화할 수 있는 수단이 창조되었잖아요. 경찰-대학-관료제가 작동시키는 가시화의 수단들은 영혼이 특정한 환경에서 성장한다는 점을 드러내요. 프로파일러들이 연쇄살인마의 개성, 시그니처 범죄방법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 속에 반영해요. 그래서 영화는 초월적 대상을 다루면서도 예술영화적인 방식을 굳이 취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국가는 1960년대의 반문화를 유익하게 사용합니다.
마지막은 개인주의에요. 1970년대 들어 자유지상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던 히피 문화의 열기는 식어버리지만, 히피 운동이 심은 가족 등 커뮤니티에 대한 적개심은 남아서 ‘자아중심주의’가 만연하게 됩니다. 이제 내 감정과 내 마음이 중요합니다. BBC의 다큐멘터리스트 ‘애덤 커티스’는 이런 개인주의가 진보의 진정한 적이라고 비판합니다. 그가 만든 <The Century of the Self>에는 프로이트의 조카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등장합니다. PR 컨설턴트인 버네이스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탐구를 홍보에 활용했어요. 개별 소비자에 초점을 맞춘 거에요. 정치의 반대편에 있는 반문화는 이제 저항을 상업화하기 시작합니다. 저항하는 ‘나’를 브랜딩하는 것이죠(커티스는 그 인물로 위대한 록 뮤지션 ‘패티 스미스’를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서 여론조사는 유권자를 일종의 소비자처럼 대합니다. 욕구와 욕망, 감정은 정치의 도구가 되고요.
커티스의 근작인 <Can't Get You Out of My Head>에선 우리가 생생히 느끼는 감정이 사실 외부에 의해 조종되는 감정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커티스의 논점 중 하나는 우리 사회가 마땅한 대안을 찾을 수 없게 현대 자본주의가 발전해왔다는 것입니다. 히피처럼 기존의 문화를 해체하자고 밖에 말하지 못한다는 거에요. 커티스가 보기에 문화 운동은 과대평가됐습니다. 이 점은 한국에 출간되어 화제를 얻은 <혁명을 팝니다> 같은 책에도 여실히 드러나 있어요.
이 이야기들은 비록 반세기 전에 나왔음에도, 여전히 힘을 갖고 있어요. 우리는 틴더로 연애 상대를 선택하죠. 여론조사를 통해 선거 결과가 나오기 전에 예측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는 개개인의 선호와 취향을 빅데이터로 수집하고 있어요. 성 정체성이 다양화되고, ‘부캐’를 만들고, 자아도 정체성도 다양화되는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 신념마저 아이스크림처럼 배합합니다. 이처럼 쿨하고 멋지다 못해 망가져버린 현대 정치에서, 우리는 오늘날에 어떤 방식으로 다른 세상을 상상해야 할까요? 이런 세상에서 정치는 너무도 멀어져 버린 사람들을 한곳에 모을 수 있을까요?
글: 강덕구 작가. <밀레니얼의 마음>(2022)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