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의 덫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애증의 정치클럽 🍂건조 에디터입니다.
저는 아직도 에디터노트를 쓰는 게 제일 어렵습니다. 7월부터 올해 총 11개의 노트를 썼는데요. 애정클을 운영하며 드는 생각들을 구독자 분들과 나누고 싶어 시작한 코너였는데, 남에게 저의 이야기를 잘 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매번 조심스럽더군요.
채 여물지 못한 상념들을 늘어놓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글 솜씨가 부족해 나누고 싶은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려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에디터노트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기꺼이 의견을 나눠주시는 구독자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댓글을 남기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늘 더없이 정성스럽고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남겨주신 분들이 줄곧 계셨습니다.
여러분이 용기를 내주신 덕분에 저 역시 한 발 앞으로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지난 2주간의 애정클 콘텐츠
- [근본적 정치 탐구] ‘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에게 겨울이 왔을까 (12/12)
- [주간 애증 담소] 📄윤석열 정부의 수능 출제 성적표 (12/14)
- [여의도 밖 정치] 어필 정신영 대표: 난민은 테러리스트도 노예도 아니다 (12/15)
- [근본적 정치 탐구: 진보정당1] 좌충좌돌, 진보정당의 역사 (12/20)
- [주간 애증 담소] ✊국힘의 최종병기는 한동훈? (12/21)
이외에도 이런 활동이 있었습니다.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 출연
- 532a. 선거제 대혼란 (12/14)
- 532b. 모피아←검찰←세상모든것 (12/15)
구독자분들께선 이런 의견을 보내주셨습니다.
철학자가 대선과 창당에 참여하는 이유 (10/13)
최진석님의 의견에 동의하기 힘든 지점이 여러 가지 있네요. 우선 근대 국가의 형성 핵심이 민족 관념에서 벗어나는 거라는 의견은 역사적으로 옳지 않은 의견입니다. 근대국가의 형성은 민족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습니다.
국가가 중앙집권화를 통해 국민에게 직접적인 통치력을 강화했고 그에 따라 부과하는 조세와 의무도 늘어난 것을 민족주의로 정당화한 것이죠. 특히 이는 자유주의로 인해 계급제가 철폐되자 자유주의와 결합하여 자유민주주의로 나아가게 됩니다. 즉 근대국가 형성의 핵심은 민족이었고 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분석은 틀렸습니다.
물론 이러한 민족의 개념이 혈연으로만 정의되는 것은 위험하고 민족주의가 국가와 일치되는 개념이 아니기에 현대 국가에서 민족주의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난점이 존재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최진석 님의 의견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그럴거면 근대국가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파가 이념적이지 않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습니다. 우파도 국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이념적인 정치를 벌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단정짓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요.
변혁보다는 기존의 질서 수호를 옹호할 때 이념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념으로 피지배층이 현 상황에 불만을 갖지 않고 순응하도록 유도해온 것이 역사적인 사례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이념적이지 않다는 단순화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파가 국가 이익을 중시하는 경향은 있지만 이는 결국 우파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는 경우에만 해당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다르게 행동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이는 좌파도 마찬가지죠.
그리고 (최진석 님이) 지나치게 이념에 매몰되어 있는 부분도 이견이 있습니다. 저는 정치는 정책을 실현하는 공간이지 이념을 현실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념에 몰두하면 현실을 이념에 맞추지 이념을 현실에 맞추지 않기 때문이죠.
물론 정당들이 이합집산에서 벗어나서 제도화를 이루고 그러한 과정에서 특정한 가치와 원칙을 바탕으로 정책을 펼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은 느슨하고 유연해야 이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어서 현실에 맞는 정책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최진석 님이 말씀하신 취지에는 일정 부분 동의는 하나 이념을 강조하는 방향성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상세한 인터뷰를 해주신 애정클님 수고하셨습니다. (민트 님)
박주리 과천시의원: 정치가 할 일을 하기 위해서, 협치 (12/1)
지역정치의 문제점을 거론할 때 거버넌스가 이뤄지지 않는 점이 핵심이어야 하는 여대야소에 그치는 점이 아쉽네요. 지자체에서 자율적으로 지역주민과 기업들과의 협치를 통해 해당 지역 내의 사안을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중앙정부는 어차피 모든 지자체의 현안을 파악할 수 없으니 말이죠. 하지만 지자체는 결국 재정의 상당수를 중앙정부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고 권한도 넉넉치 않아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동력이 부족하고 이는 곧 지역민들의 참여동기를 고갈시키죠.
즉 남는 건 지역정치가 중앙정부만 바라보는 동원되고 수동적인 형태를 지니게 되죠. 이러한 구조를 바꾸려는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아서 아쉽네요. (민트 님)
‘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에게 겨울이 왔을까 (12/12)
김대중 대통령은 개인적으로는 용서하되 사회적으로는 단죄했어야 지금처럼 5.18 과 광주, 민주화에 대한 조롱이 없었지 않을까 싶네요.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사회적 정의는 결국 독재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 게 아닐까요. (김동욱 님)
애정클 콘텐츠에 대한 다양한 의견 제시는 늘 환영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린 의견에 대해서도 피드백창을 통해 의견을 남겨주시면, 다음 에디터 노트에서 논의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편하게 찾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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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스토리
얼마 전 데이비드 런시먼의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의 목적은 민주주의 이후에도 위기에 처해 있다고 여겨진 사회의 상황을 살펴보고, 위기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통해 민주주의를 다양하게 해석해보는 것인데요.
런시먼의 결론은 책의 제목 그대로, 민주주의가 ‘자만의 덫’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런시먼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장점은 뛰어난 적응력입니다. 전제국가와 달리 민주국가는 상황에 따라 잘 변화하기에 위기를 견뎌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인해 위기에 빠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로 인해 민주주의는 ‘자만의 덫’에 빠집니다. 실수를 이겨낼 수 있다는 자만 때문에 실수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는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민주국가에서 다시 전제국가로 회귀한 나라들이 그랬고,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낳은 전쟁들이 그랬습니다. 물론 실패 후에도 민주주의는 다시 적응해 일어설 수 있지만, 그 상흔은 파괴적일 겁니다.
파국에 이르기 전, 위기의 징후를 제때 인지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런시먼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자만의 덫에 빠져 너무 느리거나, 여론에 휩쓸려 너무 조급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적응력을 과신할 때 정치인들은 타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위기를 당장 해결해야 한다는 게 분명했을 때 미국 정치에선 초당파적 결정이 이뤄졌습니다. 반대로 위기를 피하는 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체제가 안전하다고 믿을 때 타협의 여지는 줄어들었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진리가 아닙니다. 소련 붕괴 이후 많은 이들이 역사가 민주주의의 편인 것처럼 얘기했지만, 그러한 숙명론은 민주주의를 더욱 자만하게 하고 위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자만에 덫에 빠진 민주주의>를 읽으며 저의 민주주의에 대한 전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정치의 역할도 런시먼의 주장을 토대로 다시금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됐어요. 그래서 이 책의 주장을 도구 삼아 민트 님과 김동욱 님이 남겨주신 의견을 함께 읽어보려고 합니다.
두 분이 공유하는 키워드는 이념과 정책인 것 같습니다. 민트 님은 직접 언급해주셨고, 동욱 님의 의견은 전두환 사면이라는 정책과 그에 따른 사회적 정의, 즉 이념의 조형을 평가하신 것으로 읽었습니다.
런시먼은 책에서 다양한 정책의 사례를 다루었습니다. 각 정책의 이념적 성격보다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발생한 상황에 집중했는데요.
이 책만으로 파악하자면 런시먼은 민트 님처럼 정책은 ‘이념의 현실화’보다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라고 보는 듯합니다. 결국 정책이 당시의 상황에 시기적, 내용적으로 적합했는지를 중심에 두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현실에 맞는 정책을 어떻게 만들 수 있나?’ 그리고 ‘현실에 맞는 정책은 무엇인가?’라고도 질문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런시먼은 이 질문들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까진 그럭저럭 해왔다’고 말할 뿐입니다. 바로 이 ‘그럭저럭’이 자만의 원인이 되는, 떼어낼 수 없는 민주주의의 본성이지만요.
당장 눈 앞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는데 급급한 민주주의는 정책의 이념적 방향성을 진지하게 따질 여유가 없겠지요. 선거가 가까운 상황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더욱 그렇고요.
민주주의는 단기적으로 좋아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좋지 않은 결정으로 향하기 쉽습니다.
런시먼은 이러한 방식으로 발생하는 위기를 막기 위해 정부의 역할에 제약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 경제학자를 언급합니다. 시장의 자유를 철저하게 옹호한 하이에크입니다.
하이에크는 민주주의가 자제력을 배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위기를 인식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현실적이었고, 따라서 신자유주의 정책은 현실에 맞는 정책이었습니다. 현실에 맞는 정책을 만드는 방법이 바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고요.
런시먼은 하이에크의 이러한 인식을 두고 “장기적 관점을 고집하는 것도 일종의 근시안”이라고 말합니다. 하이에크가 장기적 관점을 중시한 탓에 민주주의의 현실을 오해했다는 거죠.
민주주의의 현실에 기반한 런시먼의 정책 평가에는 이념도 정의도 없습니다. 다만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민주주의의 본성이 있을 뿐입니다.
결론은, 앞으로의 민주주의 역시 위기를 헤쳐나가면서도 실수를 통해 배우지 못할 것이며, 그 결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허탈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허탈한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릅니다. 민주주의는 최선을 다해도 ‘그럭저럭’ 굴러간다고 하지만 그 ‘그럭저럭’을 유지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때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려면 선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거나, 무책임하게 여론을 따라서는 안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의 결점은 극대화되고 치명적 실수의 가능성은 높아질 테니까요.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지킬 가치가 있는 고귀한 것으로 여겨지곤 하죠. 특히 한국의 경우 수많은 희생을 통해 얻은 것이고,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의 기반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런시먼은 민주주의가 ‘당연히 옳다’는 생각이 무모함과 체념을 동시에 낳는다고 말합니다. 이를 우리의 키워드에 적용해보자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은 민주주의 사회의 정책과 사회적 정의 실현에도 적용될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적이고 무엇이 옳은지 말하기 전에, 우선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깨야 하지 않을까요?
두 분의 의견에 런시먼의 이야기가 다른 가지를 내었을지 궁금해하며 올해 마지막 에디터노트를 줄입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