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총장 몰아낸 미국판 공정 담론 ①

작년 10월 7일 발발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몰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 여파로 하버드 대학의 클로딘 게이 총장이 사임했습니다.

대학가 내에 번지는 반유대주의 시위에 대해 미온적 대처가 원인이었습니다. 12월 5일 청문회에서 게이 총장은 관련 조치에 대해 모호한 답변만 늘어놓았고, 더욱 거센 사퇴 압박에 직면했습니다. 고액 기부자들은 게이 총장이 사임하지 않는다면 기부를 끊겠다고 선언했죠.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문회 직후 논문 표절 시비까지 불거지자, 게이 총장은 1월 2일 스스로 총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취임 6개월 만이었죠. 이로써 게이 총장은 하버드 역사상 최단임 총장이 되었습니다.

2023년 12월 5일 청문회에 소환된 클로딘 게이 총장. ©Kevin Dietsch/Getty Images

하지만 반유대주의 시위는 표면상의 이유에 불과합니다. 그가 물러난 ‘진짜’ 이유는 미국판 능력주의 담론입니다. 최단임 총장이라는 오명 전 게이 총장을 가리키는 말은 하버드 최초의 흑인 여성 총장이었습니다.

보수 활동가들은 게이 총장이 그의 능력이 아닌, 흑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하버드 총장이라는 강력한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고 봤습니다. 이들은  ‘논문 표절’이라는 건수를 잡아 총장 사임까지 이를 성공적으로 공론화했죠. 게이 총장이 학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공격한 것입니다.

‘표절 의혹은 페이크였다!’

게이 총장의 논문 표절 의혹을 집중적으로 파헤친 이는 크리스토퍼 루포라는 보수 활동가입니다. 작년 글에 소개해 드린 바 있는데, 그는 ‘비판적 인종이론’(Critical Race Theory)라는 학술적 개념을 의도적으로 뒤틀어 진보를 공격하는 선동 도구로 만드는데 대성공을 거둔 책략가입니다.

루포는 보수 언론인들과 함께 게이 총장의 논문에서 40여 건이 넘는 표절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다른 학자들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약간의 표현을 변형했다는 의혹이었습니다.

이를 검토한 뉴욕타임스의 아네모나 하토콜리스 기자는 “의혹 대부분은 핵심 아이디어를 베낀 것이 아닌, 단순한 전문적 상용구에 불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버드대 역시 논란이 커지자 조사에 착수했는데, “부적절한 인용이 있지만 의도적이거나 무분별한 것으로 판단되지 않으며, 학문적 부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기된 표절 의혹 중 일부. ©The Washington Free Beacon

게이 총장은 이후 두 건의 수정 사항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의 학문적 신뢰도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 후였죠. 루포와 보수 언론인들은 추가적인 의혹을 발굴해 냈고, 결국 게이는 총장직을 내려놓았습니다.

루포는 본인의 선동에 당당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의도적 왜곡임을 전혀 숨기지 않습니다. ‘비판적 인종이론’에 대한 공격을 할 때도 ‘성공적으로 이 단어의 의미를 해체했으며 우리 맘대로 재정의할 것이다’라는 트윗을 서슴없이 남겼습니다.

이번 게이 총장의 표절 의혹을 파헤치는 동안에도 본인의 레시피를 생중계했는데요. 다음과 같은 트윗을 남겼습니다:

“우리 우파는 클로딘 게이 총장의 표절 의혹을 띄웠다. 다음 단계는 좌파 언론으로 이걸 슬쩍 밀반입시키는 것. 그러면 실제 그녀를 날릴 힘을 가진 중도 좌파는 할 말 없게 되겠지. 그 뒤 쥐어짜면 끝.”

©크리스토퍼 루포 / X

시작은 총장으로써 캠퍼스 내 반유대주의를 관리하지 못했다는 비판과 이에 대한 청문회에서 보인 부적절한 태도였습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마지막 결정타를 입힌 것은 전혀 상관 없어보이는, 루포가 띄운 표절 논란이었습니다. 그 논란마저 왜곡이었고요.

그는 왜 이렇게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게이 총장을 날리는데에 진심이었을까요?

최종 타겟: DEI 정책

애초부터 루포의 원대한 표적은 DEI였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 DEI의 종말을 위한 시작에 불과하다"라고 그는 말했는데요, 그에게 게이 총장은 DEI라는 거악 카르텔의 1인일 뿐이었습니다.

DEI란 Diversity(다양성), Equity(형평성), and Inclusion(포용성)의 줄임말입니다. ESG(Environment(환경), Social(사회), Governance(지배구조))와 같이 범용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입니다만, 쉽게 말하자면 산업, 정치, 행정, 교육 등에서 보다 다양한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가치이자 정책입니다.

보수 전략가들은 DEI를 ‘반능력주의 이데올로기’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게이 총장의 사임을 ‘DEI 전장에서의 첫 승리’로 여겼죠. 이들에게 게이 총장은 변변한 연구성과 없이, 그저 '흑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승승장구해 학장이 된지 5년만에 하버드 총장에까지 오른, DEI 정책의 수혜자였습니다.

즉, 루포의 표절 의혹 동기는 그들이 내세우는 ‘공정’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DEI의 상징으로 표적이 된 게이 총장에 대한 인신공격이었습니다. 루포는 총장이 사임하자 이런 표현을 남겼습니다. “SCALPED”. 고대 전쟁에서 적의 머리 가죽을 벗겨내는 행위를 말합니다.

미국은 흑인 노예제도와 함께 시작한 국가이고, 20세기 초반까지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유색인종과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의 역사가 있죠. 하지만 60년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등이 이끈 민권운동을 기점으로 DEI 정책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DEI라는 용어가 쓰이지 않았지만요)

1954년 브라운 판결로 흑인도 백인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백인들의 거센 반발로 첫 등교까지 6년이 걸렸다. 그마저도 신변의 위협 때문에 백인 보안관들의 경호를 받으며 겨우. 1960년 등교하는 당시 6세 루비 브리지스. ©AP

특히 미국 교육기관에서는 이러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성소수자 센터, 재향 군인 센터 등을 운영하고, 교육 소수자 배경의 교수진을 더 채용했으며, 교직원 대상 다양성 교육을 진행해왔죠.

그리고 노력은 여러 성과로도 이어졌습니다. 2018년에는 교수진이 다양할수록 소수 배경 학생들의 졸업률이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2019년에는 학교와 직장 내 다양성이 더욱 큰 혁신, 효율성, 문화적 감수성으로 이어진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교육기관을 더욱 포용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최근까지 꾸준히 진행되던 가운데, 2020년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게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이 늘 내재하던 사회적 갈등을 폭발시켰고, 구조적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진보 담론'에 불이 붙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많은 기업과 대학을 중심으로 DEI에 대한 관심과 정책적 수요가 더욱 폭발적으로 늘어났고요.

이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는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