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 현금으로 지불하시겠어요?
무엇이든 자꾸 보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저출산이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한국이 초저출산 사회가 된 지는 어느덧 20년이 넘었습니다. 저출산 뒤에는 늘 ‘충격’이라는 표현이 붙으므로 우리는 어떤 수치를 들어도 충격받지 않습니다. 충격과 공포에 떠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외국 학자들의 몫이죠.
우리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나 역시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삶을 실천하는 이로서 당연한 결과라며 고개를 끄덕일 뿐입니다. 누군가 저출산의 심각성을 요목조목 알려주면 구국을 위해 아이를 낳기로 결단할까요? 그럴 리가 없죠. 저출산 해결 의지가 분명한 정당이 어딘지 살피게 될 지는 몰라도요.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저출산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한국인이 우리 뿐만이 아니라는 거죠. 정치인들도 그렇습니다. 근거는 현재 정치권에서 얘기되는 저출산 정책입니다.
어떤 정책을 시행하는 거야?
2024년부터 새롭게 시행되는 저출산 정책은 이렇습니다.
- 양육비 지원 강화: 부모급여 인상(0세 월 100만원, 1세 월 50만원), ‘첫만남 이용권’ 강화(둘째 이상 300만원)
- 세제지원: 자녀장려금 확대 및 소득기준 완화, 자녀세액공제 확대, 산후조리비용 세액공제 소득기준 폐지, 혼인˙출산 증여세 공제 신설
- 주거지원: 신생아 특례 주택자금대출 신설, 2년 이내 임신˙출산한 가구 대상 주택 우선 공급
- 늘봄학교 전면 확대, 유보통합
- 난임 시술비 지원 확대 및 소득기준 폐지
정부 대책은 저출산 대응 5대 핵심과제(돌봄·교육, 일·가정 양립, 주거지원, 양육비 경감, 건강)를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예산을 쏟은 분야는 주거지원과 양육비 경감입니다. 이미 결혼한 가구에게 아이를 낳을 경우 혜택을 주는 정책이죠.
이 분야의 정책은 현금 지원을 수단으로 합니다. 아동수당, 신혼부부 대출, 이자·세금 감면 혜택 등이 해당되는데요. 지금까지 시행되어온 저출산 대책의 대부분은 현금 지원이었습니다.
현금 지원 중심의 정책 방향은 중앙정부, 지방정부를 가리지 않았어요. 전국 지자체의 2022년 출산 지원 정책의 69.4%가 현금 지원 방식이었습니다. 인프라 정책 비중은 6.6%였습니다. 인천시에선 지난 12월 아이를 낳으면 총 1억원을 단계적으로 지급하는 정책을 발표해 화제가 됐죠.
좋은 정책이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상황에서 현금 지원 정책은 효과가 없습니다.
저출산의 해법은 이미 나와있습니다. 긴 노동시간, 성차별, 경력단절, 과도한 경쟁 등 구조의 문제를 바꾸는 것이죠. 국내외의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말해왔습니다. 일시적인 현금 지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죠.
현금 정책이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적합한 방식의 현금 지원이 인프라 개선과 병행된다면 효과를 볼 수도 있어요. 일례로 충청북도는 출산육아수당(5년간 1천만원) 도입으로 전국 출생아 증가율 1위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전세계적으로 따져보면 현금 지원은 저출산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따져봤어요.
✅ 저소득층에게 효과가 없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확고한 지지층이 아닌 무당층을 설득해야 합니다. 같은 논리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 지원 없이도 출산을 고려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혼·출산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타겟으로 삼아야겠죠.
하지만 현 정책에서 혜택을 보는 것은 이미 아이를 낳을 의향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가구입니다.
소득이 낮을수록 출산율은 떨어집니다. 비정규직일수록 결혼 의향은 낮습니다. 즉 저출산 정책의 핵심 타겟은 저소득층입니다. “신혼부부까지도 못 가는 사람들”이죠.
이들은 당장 아이를 낳으면 돈을 준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양육에 돈을 써야 하는 기간은 최소 20년이니까요. 현금 지원으로 저소득층이 자녀를 낳을 수 있는 형편에 이르려면 금액이 훨씬 더 높아져야 합니다.
같은 이유로 목돈을 일시적으로 지급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저소득층일수록 미래에 소득이 줄더라도 아이를 안정적으로 기를 수 있는 환경을 바라기 때문에, 현금 지원도 장기간 지속적으로 이뤄져야만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 영유아에 집중되어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현금 지원인 아동수당은 효과가 미미했습니다. 한국은 2018년부터 아동수당을 도입했습니다. 양육 초기인 0~7세를 대상으로 매달 1인 10만원을 지급했는데요.
저출산 극복 사례로 제시되는 스웨덴과 프랑스도 아동수당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한국과 다른 점은 성장기 전체에 지속적으로 수당을 지급했다는 겁니다. 프랑스는 20세 미만, 스웨덴은 16세 미만까지 지급합니다. 독일의 경우 대학 재학 중이면 25세까지 수당을 줍니다.
당초 아동수당의 목적은 저출산 극복이 아닌 아동의 권리와 복지 증진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저출산 대책으로 아동수당을 도입했기에 영유아 시기에 지원을 집중했습니다. 양육비는 자녀가 클수록 증가하는데 말입니다.
지난해부터 정부가 지급 연령 확대를 검토하기 시작했지만, 2024년도 저출산 대책에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 지속 가능하지 않다
현금 지원의 효과는 짧습니다. 결국 양육 환경과 양육 이후의 부모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소득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2007년 출산 수당 정책을 시행해 출산율을 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출산 수당을 첫 자녀부터로 확대했지만 추가적인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금액을 올린다고 해서 효과를 계속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위원회(저출산위)의 연구 결과, 현금 지원이 일정액을 넘으면 출산율에 대한 기여도가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현금 지원은 인프라 개선 등의 정책을 함께 운영해야만 효과를 볼 수 있는데, 현금 지원에만 예산을 집중하면 다른 저출산 정책의 비중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일각에서는 단기간의 효과라도 보기 위해 현금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현금 지원이 최선은 아니지만, 최후의 수단까지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사회 제도의 종합적인 개선을 뒤로 한 채 ‘최후의 수단’을 꺼내드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앞으로 바뀐대?
이번달에 각 정당도 저출산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22대 총선을 앞두고 펼쳐진 첫 공약 대결이었는데요. 국민의힘은 일·가정 양립, 더불어민주당은 주거·금융 지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국민의힘
- 남성 유급 출산휴가 1개월 의무화
- 육아휴직급여 상한액 인상 (150만원 → 210만원)
- 초3까지 유급 자녀돌봄휴가 신설 (연 5일)
- 임신 중 육아휴직 배우자에게도 허용
🟦더불어민주당
- 모든 신혼부부 결혼출산지원금 1억원 대출 (자녀 1명 낳으면 이자 감면, 2명 낳으면 원금 50% 감면, 3명 낳으면 원금 전액 감면)
- 8~17살 아동수당 1명당 월 20만원 지급
- 출생~고교 졸업까지 매월 10만원 펀드 지급
- 분양전환 공공임대 주택 지원 (자녀 2명 24평, 3명 33평)
- 아이 가진 모든 국민 출산전후휴가급여, 육아휴직급여 보장
여야 공약과 정부안은 사실상 같습니다. 정부안과 민주당 공약은 현금 지원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비슷하죠. 국힘 공약은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저고위에서 제시돼 정부에서 추진 중인 안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한편 국힘과 민주당의 공약은 핵심을 비껴간다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기존 정책을 손질하는 선에 그쳐 효과적인 정책 시행을 위해 꼭 고려해야 할 지점을 다루지 못했어요.
🟥국힘 공약
- 육아휴직을 쓰기 어려운 직장 문화와 육아휴직 격차를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육아휴직 이용률은 신생아당 19.8%입니다. OECD 평균은 88.4%고요. 비정규직, 작은 기업일수록 이용률은 더 떨어집니다.
- 고용보험 바깥의 사각지대를 해소할 방법이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육아휴직은 고용보험 가입자만 쓸 수 있습니다. 지난해 8월 기준 전체 임금 근로자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77%, 비정규직의 가입률은 54.2%입니다.
- 재원 마련 방안이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고용보험기금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예산을 마련할 창의적인 방법이 필요한데, 구체적인 안이 나오지 않았어요.
🟦민주당 공약
- 앞서 말한 현금 지원 정책의 단점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목돈에 집중한 정책이기도 하고요.
- 역시 재원 마련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민주당 대책 시행엔 연 28조원이 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난해 저출산 예산 전체에 맞먹는 규모입니다. 당장 예산을 두 배로 늘려야 가능하죠.
재원 문제를 두고는 당장 저출산위와 기획재정부도 부딪히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출산위가 올해 새롭게 도입되는 저출산 정책으로 육아휴직급여 인상을 홍보해왔지만, 기재부의 반대로 미뤄졌습니다. 주요 저출산 정책이 이미 많고, 예산을 많이 소요하고 있어 육아휴직급여까지 인상할 여유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한국의 저출산 예산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습니다.
- 지난 15년간 정부가 지출한 저출산 예산은 280조원이 넘습니다. 큰돈이지만, 충분하진 않았습니다. 효과 없는 정책이 반복된 탓도 있지만, 일단 절대적인 금액이 부족했습니다.
- 한국의 가족 지원 예산은 GDP 대비 1.6%, OECD 회원국 평균은 2.2%입니다. 유럽 국가들은 3%대 중후반입니다. 육아 지원이 부족하다는 일본도 1%대 후반을 씁니다.
- 심지어 현금 지원 예산도 낮은 축에 속했습니다. OECD 회원국 평균의 45% 수준입니다. 하지만 양육비 부담은 GDP 대비 전세계에서 가장 높습니다.
사실 답은 이미 나와있습니다. 문제는 진정성입니다. 저출산 정책이 까다로운 것은 여러 분야 정책의 조합으로 추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출산이라는 의사결정에 개입하는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죠. 출산을 기피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사려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효과적인 정책 세트를 고안할 수 없습니다.
현금 지원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정책결정자에게 쉬운 정책입니다. 금액을 내세워 정부가 ‘충분히 노력했다’고 내세울 수 있으니까요. 현금 살포는 정치권이 단기간에 큰 액션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민간 싱크탱크 LAB2050의 윤형중 대표는 ‘저출생 담론이 저출생의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저출산 정책에 내포된 인식이 저출산 현상을 만들었다는 건데요.
현금 지원 중심의 정책에 담긴 인식을 요약해보자면, ‘애 낳는데 돈까지 준다’가 아닐까요.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는 이들에 대한 존중도, 이해도 부족한 인식입니다. 역시 저출산의 심각성을 가장 열심히 외면하고 있는 건 정치권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