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놀이터: 놀이터에서 정치하기

여러분은 아이들이 많은 동네에 살고 계신가요? 저는 초등학교 바로 옆에 살고 있어 아이들을 자주 마주칩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집 근처 카페에도, 학부모와 초등학생이 아닌 손님은 저뿐이네요. 하지만 걸어서 10분 거리인 대학가 카페를 가면 어린이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바야흐로 노키즈존의 시대니까요. 공공장소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진 않습니다. 지하철에도 아이와 동행하기가 부담스러워 택시를 타는 일이 흔하다고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놀이터는 어린이가 주인인 거의 유일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어떤 어린이에게는 놀이터마저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장애 아동이 이용할 수 있는 놀이터, 일명 통합놀이터는 전국 약 8만 개의 놀이터 중 0.04%, 29곳뿐입니다. 그리고 전체 아동 중 장애 아동은 10%입니다.

한편 통합놀이터를 만드는 사람들은 0.04%와 10%라는 수치의 차이 이상을 바라봅니다. 이들은 ‘통합’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놀이터는 ‘통합’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실험의 장이라는 겁니다.

오늘의 <쓸모있는 정치플리>에선 통합놀이터를 통해 정치적 결정 과정과 그 안에서 발휘될 수 있는 상상력을 살펴보겠습니다.

키워드: 통합놀이터, 장애 감수성, 숙의 민주주의

미리 보는 결론: 놀이터를 통해 민주주의를 연습할 수 있다!

왜 중요해?

  • 「유엔아동권리협약」 제31조와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7조에 따르면 모든 아동이 장애 유무나 장애 정도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 완전히 참여해 놀 권리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 하지만 우리나라의 장애 아동은 접근 가능한 시설도 부족하고, 장애 아동을 꺼리는 분위기 때문에 놀이터를 찾기도 어렵습니다.
  • 이런 환경은 비장애 아동에게 장애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기 쉽습니다. 실제로 장애 아동과 어울리는 일이 드문 고연령대 아동일수록 장애 아동을 과도하게 배려하거나 의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통합놀이터는 장애 아동을 포함한 모든 어린이가 소외되지 않고 동등한 놀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놀이터를 말합니다.

어떻게 바꾸고 있어?

통합놀이터 사업은 거의 지자체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놀이터는 주민들의 생활과 밀착된 장소인데, 지자체가 나서면 주민들의 욕구를 섬세하게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서울시 노원구의 사례📌

통합놀이터 조성에 가장 적극적인 지자체는 서울 노원구입니다. 노원구는 비영리단체 세이브더칠드런과 협업해 구내 놀이터 전반을 개선하는 통합놀이환경조성 1000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는 통합놀이환경 진단, 진단 결과에 따른 개선계획 실행, 주민참여 워크숍으로 구성됐습니다.

통합놀이환경 진단 조사단은 총 165명으로, 이중 83명이 아동입니다. 조사단은 올 8월까지 지역내 놀이터를 전수조사할 예정입니다. 워크숍에서는 역시 아동과 성인이 함께 통합놀이터 설계 방향을 논의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노원구 노연수 구의원이 주도합니다. 지난 6일, 노원구청에서 노 의원을 만나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경위를 들어봤는데요.

노연수 의원은 10살 아들을 둔 학부모입니다. 그는 아들과 매일 놀이터에 나갈 때마다 장애 아동 또는 부모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2018년 노원구 첫 통합놀이터인 초록숲 놀이터가 조성됐지만, 비장애 아동이 함께 이용하는 일이 적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노 의원은 이를 해결하고자 통합놀이터 조성을 지난 지선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노원구 초록숲 놀이터. 휠체어를 타고도 들어갈 수 있는 회전 놀이기구와 보호자가 장애아동을 안고 탈 수 있는 광폭 슬라이드 등이 설치됐습니다. ⓒ애증의 정치클럽

노연수 의원은 통합놀이터가 장애 아동의 놀 권리 보장을 넘어 돌봄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장애를 가진 부모의 돌봄, 실외에서 이뤄지는 돌봄, 다양한 세대가 참여하는 돌봄을 지원하는 것이 노 의원의 목표입니다.

조성된 통합놀이터에는 놀이지도사(가칭)를 배치할 계획입니다. 노연수 의원은 비장애 부모도 놀이터에 아이를 마음 편히 내놓기가 쉽지 않다며, 실외에서도 장애·비장애 아동 모두에게 신뢰 가능한 돌봄을 제공하는 놀이지도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1000일의 프로젝트 기간도 지도사 양성 과정 개발과 교육 기간을 확보하기 위해 설정됐습니다. 지도사 자리를 노인 일자리 및 청년 활동으로 꾸려 세대 간 통합의 자리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모든 공공사업에는 행정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특히 통합놀이터 프로젝트는 관련 부서가 여러 곳이어서 부서 간 협업도 중요합니다. 놀이지도사 양성은 아동청소년과, 놀이시설 제작은 푸른도시과에서 담당합니다. 여성가족과, 장애인복지과에도 업무가 걸쳐 있습니다. 노원구에서 이렇게 많은 부서의 과장들이 한 번에 모인 것도, 구의원 주도로 집행부서 간 협업이 이뤄진 것도 통합놀이터 프로젝트가 처음입니다.

‘모두 맘껏 놀이터 만들기 1000일-아동권리 증진을 위한 협약식’에서 발언하는 노연수 의원 ⓒ나우온 노원뉴스

노연수 의원은 그럼에도 큰 갈등 없이 사업이 진행됐다고 밝혔습니다. 그 배경엔 노원구의 높은 장애감수성이 있습니다. 장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 바르게 이해하고 장애인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노원구는 장애인 복지 예산 총액과 1인당 예산 모두 서울시 자치구 중 가장 높은 편입니다. 통합놀이터의 필요성에 대해 행정 공무원과 주민들이 모두 공감했고, 구의원들 간 의견차도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오승록 노원구청장의 지지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노원구의 사례는 여러모로 고무적입니다. 1️⃣ 의회, 행정, 주민의 협의를 원활하게 이끌어냈고, 2️⃣ 아동을 포함한 주민들의 실질적 참여를 보장했으며, 3️⃣ 시민단체와의 협업으로 사업 지원과 전문성을 확보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는 민주주의📌

창원시는 놀이터 관련 조례를 제정하며 통합놀이터에 대한 조항을 넣었습니다. 조례 제정은 창원형 어린이 놀이터 사업 과정에서 이뤄졌는데요. 해당 사업은 숙의 민주주의 방식을 택해 화제가 됐습니다. 이를 주제로 다큐멘터리 <놀이터 민주주의>가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숙의 민주주의란 일반 시민들이 충분히 생각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토론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민주주의의 형식입니다. 창원형 놀이터는 디자인부터 부지 선정까지, 사업의 모든 단계에서 주민참여단의 토론이 이뤄졌습니다. 노원구와 마찬가지로 시의원, 행정 공무원, 시민단체 주민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했습니다.

<놀이터 민주주의>의 한 장면, 창원형 놀이터의 주민참여단이 논의하는 모습 ⓒMBC경남

사업에 참여한 창원 시민들은 하나같이 “머리털 나고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며 즐거워했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며, 합의한 해결책을 실현하는 것. 정치의 핵심이지만 현실 정치에선 드문 일입니다.

노원구와 창원시의 성과는 놀이터를 주제로 해서 가능했던 걸지도 모릅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생각하는, 손에 잡히는 문제기 때문에 시작부터 해결 의지와 관심도가 높았습니다. 그럼에도 민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경험은 주민들의 정치적 인식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효능감 있는 정치 경험은 정치 혐오를 녹였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사업 참여 과정에서 정치인과 공무원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았다고 말했습니다. 일부 참여자들은 자발적으로 시민단체를 조직하거나 소속된 집단에서 공공사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창원시 사업에서는 마산, 창원, 진해 세 지역 주민들이 의견을 조율하며 지역 감정을 해소하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앞으로 지켜볼 것은?

현재 통합놀이터에 대한 조례를 두고 있는 지자체는 9곳입니다. 그러나 통합놀이터 관련 법률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는데요. 상위법의 부재는 지자체 사업 추진의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 놀이터와 관련된 법률로는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법어린이제품 안전특별법이 있습니다. 전자는 어린이놀이시설의 설치·유지 및 보수와 안전관리 체계 구축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어린이가 사용하는 제품의 안전 확보를 위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안전 중심 놀이터 규제놀이기구의 창작을 제한한다는 겁니다. 일례로 휠체어 그네는 안전기준이 없어 놀이시설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로 인해 성악가 조수미 씨가 전국 특수학교에 기증한 휠체어 그네가 설치 1년여만에 모두 철거되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놀이기구에 맞는 안전기준을 만들려면 매번 최소 2~3년이 소요됩니다. 해외에서 제작한 놀이기구를 수입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2020년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의원이 통합놀이터의 법적 기준 마련과 조성 의무를 담은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상임위원회에서 계류됐습니다. 모든 놀이시설에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관련 부처들이 책임을 떠넘긴 탓도 있습니다. 놀이시설 설치 및 관리는 행정안전부, 놀이기구 제조 및 인증은 산업기술자원부 소관인데요. 행안부는 산자부가 안전인증을 해 줘야 통합 놀이기구 관리가 가능하다는 입장, 산자부는 행안부가 통합 놀이기구 보급을 지원해야 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관련 부처들의 원론적인 입장은 문제 해결 의지가 크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지역사회는 공론을 기반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중앙정부로 그 의지가 모이는 것은 더딘 상황입니다.

통합놀이터 논의가 국내에서 시작된 지 20년, 그간 수 회의 간담회와 관련 발의가 있었지만 정부는 지지부진했습니다. 지난 4일,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의원국민의힘 김예지 의원 등의 주최로 또 한 번의 통합놀이터 관련 국회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과연 이번 국회에서는 유의미한 제도적 개선이 이뤄질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건조 스테이션: 생각할 거리 자동재생

🎵 노키즈존 - Love is an open door

노키즈존을 제한할 법적 근거는 아직 없습니다. 실제로 법안이 없기도 하지만, 헌법상 ‘영업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법적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오는데요. 정말 노키즈존에 대한 제도적 해결책은 없는 걸까요?

🎵 청소년 참정권 - 정치는 누가 가르치지?

놀이터 사업 주민참여단은 드물고, 아동 참여자는 더 드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 18세가 되어 투표권을 얻기 전까지 정치 참여를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투표권을 얻어도 교육 현장에서 선거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교사의 정치적 중립 등을 이유로 들며 정치 교육에 유독 엄격한 분위기입니다. 제도권 정치 교육의 선은 어디까지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