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 선 중대재해처벌법
어느덧 연말입니다. 한 해를 정리하는 데 있어 가장 직관적인 도구는 숫자일 겁니다. 언론은 지난해와 올해의 주요 통계 수치를 비교하면서 1년을 평가하곤 하는데요. 저에게 올해 눈여겨 볼 통계를 하나 꼽으라면,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 수를 고르겠습니다. 2021년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중대법)의 효과를 평가할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중대법은 최근 몇 년 간 통과된 법안 중에서도 특히 논쟁적인 사안이었습니다. 노동계는 법안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하고, 경영계는 법안을 무효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최근의 판세는 경영계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3일,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내년부터 시행 예정이었던 ‘50인 미만 사업장 적용’을 2년 미루기로 합의했고 더불어민주당은 조건부 찬성 입장을 밝혔습니다.
국내에서 매년 8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일하다 죽습니다. 한국의 산업 안전 수준은 OECD 38개국 중 34위로, 결코 노동자에게 안전하다고 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중대법 시행 2년 차, 지금껏 걸어온 길을 그대로 가도 괜찮은 걸까요? 아니면 이 시점에서 다른 길을 살펴봐야 할까요?
⭐ 키워드: 중대재해처벌법, 산업안전보건법, 노동, 안전
⭐ 미리 보는 결론: 중대재해처벌법, 끝이 아니라 시작
왜 중요해?
시사인 전혜원 기자는 중대법 논쟁이 산업재해의 원인을 해석하는 세계관의 차이를 드러낸다고 분석합니다. 중대법을 통해 우리는 노동 현장과 정치의 거리를 가늠하고, 각 진영이 기업과 노동자의 관점을 어떻게 수용하는지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중대법 도입 배경과 찬반 논의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산재 예방을 위한 법안은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 처벌법입니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 산업 안전과 보건의 기준을 제시하고, 산재의 책임 소재를 정하는 법률입니다. 1981년에 제정돼 현재도 시행 중입니다.
- 한계: 산안법은 안전 규제를 어긴 ‘행위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주로 현장 관리자나 노동자 개인이 처벌 대상이 됩니다. 그렇기에 산안법만으로는 사고를 야기하는 기업의 구조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하청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 원청이 책임을 피해가기 쉽다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 김용균법: 2018년, 한국서부발전의 하청 노동자였던 24세 김용균 씨가 태안 발전소에서 일하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졌습니다. 안전조치가 제대로 취해지지 않은 탓이었습니다. 책임자 재판에서 원청인 한국서부발전은 처벌을 피해갔습니다.
김용균 씨 유족은 단식 농성을 벌이며 법 개정을 촉구했습니다. 그 결과 ‘김용균법’이 도입됐습니다. 원청 사업장 내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 산재에 대해 원청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하는 산안법 개정안입니다. 원청이 책임을 지는 사업장 종류의 숫자도 확대됐습니다.
🏢 중대재해처벌법(중대법)
경영 책임자가 ‘위험 방지 의무’를 다하지 않아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법률입니다.
중대재해=중대산업재해 + 중대시민재해 포괄
중대산업재해: 1️⃣사망자 1명 이상, 2️⃣동일 사고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3️⃣동일 유해요인으로 인한 직업성 질병자가 1년에 3명 이상인 산업재해를 말합니다.
중대시민재해: 공공시설의 결함으로 중대산업재해와 같은 수준의 피해가 발생한 재해를 말합니다. 책임 공무원이 처벌 대상이 됩니다.
- 역사: 중대법 제정운동은 2006년부터 본격화됐습니다. 2013년부터 진보정당들의 입법 시도가 있었는데요. 2017년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제2의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막겠다”며 발의해 화제가 됐습니다.
- 통과: 김용균 씨 유족은 산안법 개정과 함께 중대법 제정을 요구했습니다. 2020년 정의당, 더불어민주당 의원 중심으로 중대법이 연이어 발의됐고 합의안이 2021년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정의당과 노동계는 합의안이 후퇴했다며 비판했습니다. 원안과 달리 합의안은 5인 미만 사업장을 처벌 대상에서 제외했고, 50인 미만 사업장에 2년의 유예 기간을 주었습니다.
✔️차이점
- 산안법은 안전 기준 마련, 중대법은 처벌을 통한 예방을 목적으로 합니다.
- 산안법은 업종과 사업장 조건에 따라 적용 범위가 조금씩 다르지만, 중대법은 5인 미만 사업장을 전면 제외합니다.
- 산안법은 원청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경우가 제한적이지만, 중대법은 도급·용역·위탁 등의 계약이 이뤄졌다면 그 형식에 관계없이 원청의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중대법에 대한 찬반 입장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 반대 입장
- 경영계는 중대법이 ‘명확성의 원칙’을 위배한다고 봅니다. 법은 어떤 행위를 처벌할지 명확히 규정해 행위 결정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원칙인데요. 1️⃣ 중대법의 ‘위험 방지 의무’가 너무 포괄적이고, 2️⃣사망 사고와 ‘의무 위반’의 인과관계를 단정지을 수 없으며, 3️⃣ '경영책임자 등'이라는 책임 주체도 정의하기 어려워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겁니다.
- 기업의 활동을 위축시켜 경제적 타격이 있을 거란 비판도 있습니다.
- 경영 책임자가 징역을 피하고자 사고 예방보다 법적 책임을 피하는데 집중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 산안법의 문제로 지적된 부분과 맞닿습니다. 산업재해의 원인은 ‘행위자’의 과실에 있다며 기업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음을 강조하는 겁니다.
⭕ 찬성 입장
찬성 측에선 반대 측의 해석이 현장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봅니다.
- 하청 노동자의 산재 사망 사고 비율은 원청 노동자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1️⃣ 원청이 책임을 덜기 위해 위험한 작업을 하청에 몰아주고, 2️⃣ 안전 관련 의사 결정에서 하청 노동자를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3️⃣ 또한 하청의 안전수칙 위반은 많은 경우 원청의 무리한 요구에 맞추려다 벌어집니다.
- 중대법은 산안법을 기반으로 하는 법안입니다. 따라서 ‘위험 방지 의무’의 모호성은 산안법에서 축적된 기준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반박이 나옵니다. 중대법에서 요구하는 조치는 안전에 대한 목표와 관리 체계 마련 정도로, 기업이 의지를 가지고 나서기만 한다면 충분히 충족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떻게 바꾼대?
🟥윤석열 정부·국민의힘: 처벌보단 예방 중심으로
- 지난해 국민의힘은 중대법 시행 이후 산재 사망 사고가 오히려 늘어났다며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50인 미만 기업 적용 유예는 중소기업들이 아직 준비되지 않아 당장 시행하면 영세기업 폐업과 일자리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추진됐습니다. 국민의힘 임이자 의원이 지난 9월 관련 법안을 대표발의했습니다.
- 국민의힘 박대출 의원은 정부가 중대재해 예방 기준을 명확히 고시하고, 정부 권고를 이행해 인증을 받으면 처벌 수위를 낮추는 안을 발의했습니다.
- 국민의힘 노용호 의원은 중대재해 예방 시설 마련 비용을 정부가 지원하는 안을 발의했습니다.
- 당시 고용노동부와 국민의힘이 내세우는 통계는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산업재해 통계 기준이 2021년부터 바뀌었는데, 이전 기준을 적용한 2021년 통계와 새로운 기준을 적용한 2022년 통계를 비교했다는 겁니다.
- 그러나 유족급여 승인 기준으로 보면 실제로 2021년에서 2022년 사이 산재 사망자가 증가했습니다. 반면 2022년과 2023년의 경우, 재해조사 대상 사망사고 발생 현황을 보면 올해 3분기까지 사망자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1명 감소했습니다. 법안의 효과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더불어민주당·정의당: 처벌은 세게, 적용 대상은 넓게
- 야당은 소규모 사업장에서의 산재 사망 사고가 더 많다며 적용 대상 확대가 시급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전체 중대재해의 60%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합니다.
-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은 벌금형을 최대 기준을 정하는 것에서 최소 기준을 정하는 방식으로 바꿔 처벌 수위를 높이는 안을 발의했습니다.
- 더불어민주당 강민정 의원은 5인 미만 사업장까지 적용 대상을 넓히는 안을 발의했습니다.
- 정의당 강은미 의원은 적용 대상을 모든 사업장으로 넓히고, 중대재해 범위를 넓히며 처벌 대상자인 ‘경영책임자’를 구체적으로 정하는 안을 발의했습니다.
- 그러나 이번에 정부여당이 제기한 50인 미만 기업 적용 유예에 대해 민주당은 타협 의지를 보였습니다. 민주당이 밝힌 찬성 조건은 1️⃣준비 소홀에 대한 정부 사과, 2️⃣ 정부의 유예 후 로드맵 제시, 3️⃣ 2년 뒤에 다시 시행한다는 약속입니다. 정의당은 결사 반대 입장입니다.
✔️ 자율규제가 답?
고용노동부는 중대법을 자율규제로 전환하는 안을 얘기합니다. 지난해 11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기업의 부담을 덜기 위해 ‘규제와 처벌’ 중심에서 ‘자율과 예방’으로 이행하겠다고 밝혔는데요.
고용노동부는 영국 사례를 근거로 듭니다. 영국은 자율규제 기반 법안을 도입하면서 사망 사고를 획기적으로 줄였다는 겁니다.
영국의 ‘로벤스 보고서’
- 영국의 정책은 고용노동부의 지향과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성공했습니다. 1970년, 영국은 산재 사망을 줄이기 위해 ‘일터에서의 안전과 보건에 관한 위원회’(Committee on Safety and Health at Work)라는 기구를 설립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선 매년 약 1000명이 산재로 숨졌습니다.
- 2년의 연구 결과 위원회는 ‘로벤스 보고서’라 불리는 정책보고서를 냈습니다. 보고서는 자율규제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기업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정부가 상세한 규제를 만들어 강요하면 안전 문제를 규제에 의존해 다루면서 안전에 대한 사업주의 관심이 오히려 떨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 ‘로벤스 보고서’는 사업주의 의무를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합리적으로 실행 가능한 범위에서 노동자의 안전과 보건 및 복리를 보장해야 한다.” 중대법의 ‘위험 방지 의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입니다. 또한 로벤스 보고서는 정부 하위 법령을 통해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게 했고, 중대법은 대통령령으로 정하게 하고 있습니다.
- 30년 후인 2008년, 영국은 자율규제가 부족하다고 여겨 기업살인법이라 불리는 법안을 도입했습니다. 산재가 발생한 기업에 벌금을 물리는 내용으로, 한국의 중대법은 이 기업살인법을 본따 도입한 것입니다.
- 영국의 자율규제 도입은 문제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을 통해 나온 결론입니다. 정책 성공의 비결은 자율규제 도입보다 문제를 다루는 태도에 있었다고 보는 게 합당할 수 있습니다. 이후 법적 규제를 추가로 도입해 효과를 본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중대법 도입 당시, 즉 문재인 정부 때 고용노동부는 중대법의 의도가 처벌이 아닌 예방에 있으며, 기업이 스스로 안전 기준을 만들어 이행했다면 산재 사망 사고가 나더라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중대법은 자율규제 흐름을 촉진하기 위한 기반으로서 도입됐으며, 자율규제와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지켜볼 것은?
- 중대법 시행 2년 간 변화는 크지 않았습니다. 경영 책임자에게 실형이 선고된 사례는 1건 뿐입니다. 이외에 1심 판결이 내려진 10건은 모두 집행유예를 받았습니다. 양형 이유로 고려된 것은 ‘피해자 과실’, ‘유족 합의’, ‘관행’ 등이었습니다. 지난해 중대법 적용 사건 중 검찰 송치 사건 비율은 22.7%에 불과했습니다.
- 이를 두고 진보언론은 법원과 검찰이 법안을 무력화한다고 말하고, 보수언론은 과잉수사로 행정력만 낭비하고 기업 힘만 뺐다고 말합니다. 양측에서 부정적 평가가 난무하는 가운데, 판례가 쌓이면 모호한 기준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 정부여당은 50인 미만 기업까지 확대되면 처벌 사례가 급증할 거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럴지는 중소기업의 준비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앞서 언급한 로드맵에서 중소기업 대상으로 안전관리 역량 향상 지원을 펼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확대 적용 유예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지원책이 실효성 있게 집행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 한편 당장 산재 사망 사고를 줄이려면 불법 하도급 등 노동 현장의 실질적인 사고 요인부터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산재 사망자의 53%가 건설업 종사자입니다. 불법 하도급은 안전 사고부터 임금체불, 부실시공 등을 유발하는 건설업계의 고질적 문제로 꼽히는데요. 하청이 또 다른 하청을 다단계로 고용해 일을 시키는 겁니다.
- 마지막으로, 민주당은 50인 미만 기업 적용 유예에 조건부 찬성 의견을 보이면서 지지기반인 노동계의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모두 회의적인데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의 입장이 어떤 효과를 불러올지도 두고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