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마을이 필요한 저출산 대책

280조원, 2006년부터 2021년까지 저출산 대책에 쓰인 예산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예산을 쏟아부은 결과는 출산율 0.75명이라는 충격적 수치였습니다.

접근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비판은 이미 넘칩니다. 출산 지원, 육아 지원에 초점을 맞춘 정책은 저출산 해결을 위해 뭔가 하고 있다는 기분만 낼 뿐, 근본적 원인인 일과 가정의 양립에선 눈을 돌린다는 겁니다. 제대로 된 진단에 기초한 매력적인 정책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나이지리아 속담은 이제 유명하지요. 몇몇 지자체에선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답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일명 육아친화마을 형성인데요.

오랜만에 돌아온 <쓸모있는 정치플리>에서 육아친화마을의 실험 상황과 가능성을 살펴보겠습니다.

키워드: 지역사회, 공동육아, 저출산

⭐ 미리 보는 결론: 거시적인 해결책, 지자체부터 해보면 어떨까?

왜 중요해?

육아친화마을이란 말 그대로 ‘육아하기 좋은 환경’을 갖춘 마을로, 육아정책연구소에서 개발한 모델입니다.

육아친화마을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육아에 필요한 다양한 인프라

2️⃣ 일상생활에서 육아에 불편함이 없게 하는 물리적 환경

3️⃣ 육아하는 가정을 배려하고 아이를 환대하는 철학

4️⃣ 육아를 지원하는 인적 네트워크

이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인적 네트워크 형성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육아 공동체를 만들어 ‘품앗이 육아’를 하고, 육아와 관련해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겁니다.

무엇보다 지역사회가 문제 해결을 주도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출산은 지역이 가진 다양한 조건을 종합적으로 살펴 결정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각 지역마다 저출산의 원인은 미묘하게 다릅니다. 게다가 육아 주체의 특성에 따라 필요한 사회적 지원이 달라집니다. 정확한 처방을 내리기 위해선 이 모든 요소가 지역사회 안에서 충실히 검토되어야 합니다. 중앙정부의 협력을 끌어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울어도 괜찮아’ 스티커. 공공장소에서 우는 아이 때문에 곤란해 하는 부모를 격려하자는 캠페인이다. ⓒ마이니치신문

우리보다 저출산을 먼저 경험한 일본에 유사한 선례가 있습니다. 일본은 1994년부터 ‘엔젤플랜’이란 이름의 국가 주도 저출산 계획을 짜다가, 2005년부터 기초자치단체 차원의 저출산 행동계획 수립을 의무화했습니다. 지역이 원하는 아동의 성장과 육아 지원의 형태를 맞춤형으로 만들게 되면서, 저출산 정책이 행정의 차원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전개됐습니다.

국내의 유사한 정책으로는 가족친화마을, 아동친화도시 등이 있습니다.

가족친화마을은 가족 내 돌봄을 지역사회 차원에서 분담할 수 있고, 다양한 가족구성원이 필요로 하는 인프라를 갖춘 마을입니다. 지역사회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육아친화마을과 유사합니다. 여성가족부와 보건복지부에서 2007년부터 시행했지만, 주목할만한 성과는 없었습니다. 대구광역시와 울산광역시 등에서 시행됐습니다.

아동친화도시는 유니세프가 인증하는 지자체로, 아동의 안전과 권리가 보장되며 아동 중심으로 운영되는 도시를 말합니다. 구체적인 요건으로는 UN아동권리협약의 이행, 아동권리 전담조직, 아동예산 분석 및 확보 등이 있습니다. 현재 국내 122개의 지자체가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받았습니다.

아동친화도시 인증 요건 ⓒ유니세프

육아친화마을은 아동, 가족이라는 특정 대상이 아닌 ‘육아’라는 행위 자체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앞선 정책들과 차별화됩니다. 그렇기에 육아친화성이라는 개념은 일과 가정의 양립, 육아와 관련된 일상생활이 이뤄지는 물리적 공간과 인적 네트워크의 문제를 포괄하게 됩니다.

어떻게 바꾼대?

육아친화마을의 구성요소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서비스 인프라

  • 의료시설: 산부인과, 소아과 등
  • 교육시설: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그외 교육기관
  • 문화체육시설: 도서관, 복합쇼핑센터, 체육시설 등
  • 육아지원기관: 육아종합지원센터, 지역아동센터, 장난감 도서관 등

물리적 환경

  • 유모차 접근성
  • 충분하고 안전한 놀이공간: 공원, 녹지
  • 육아 공간: 수유 및 기저귀 갈이를 위한 공간
  • 대중교통의 편리성

철학

  • 아이와 육아하는 가족에 대한 환대 및 배려
  • 아이다움에 대한 인정
  • 성평등한 육아문화
  • 육아친화적 가치 공유 기회 확대

인적 네트워크

  • 인적 네트워크 연결: 우리동네보육반장, 온라인 마을맘 등
  • 육아하는 가정 간 연결 및 지원: 마을공동체 형성
  • 소통을 위한 공간: 육아나눔터 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요소를 객관적 지표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일회성 정책에 그치지 않기 위해선 인증 제도와 그 기준이 필요합니다. 육아정책연구소는 우선 지자체 차원에서 마을 현황을 진단하는 육아 친화성 지표를 만들고, 그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거주민의 주관적 진단을 담은 육아친화 진단 체크리스트를 함께 구성하길 제안합니다.

몇몇 지자체에서는 연구 지표를 기반으로 육아친화마을 운영 시범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 남양주의 경우 민간 주도로 육아친화 커뮤니티가 만들어졌습니다. 사회혁신기업 ‘더함’의 민간임대주택 위스테이 별내입니다. 한국 최초의 협동조합형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으로,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이 마련돼있습니다.
  • 위스테이 별내 입주민들은 어린이집과 초등 방과후 돌봄, 놀이광장 등을 운영해 아이를 기르는 가족들이 공동 육아를 할 수 있게 합니다.
  • 아이를 기르는 가정에 대한 배려, 양성 평등한 육아문화에 대한 평가에서 남양주시 별내동 전체와 위스테이 별내 입주민 간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커뮤니티 활동 중인 위스테이 입주민들 ⓒ위스테이

부산광역시

  • 출산을 넘어 돌봄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올해부터 육아친화마을 운영 지원사업을 시작했습니다.
  • 지난해 수영구와 강서구가 시범지역으로 선정됐습니다. 두 지역에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육아 공동체가 존재했습니다. 강서구 육아 공동체 ‘우가우가’에는 4년째 15가구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교육, 문화시설이 부족한 강서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모들이 직접 수업 내용을 만들어 활동 중입니다.
  • 이러한 공동체의 경험을 연구해 올해 시범지역을 추가 선정했습니다. 육아기관 연계 생활권별 찾아가는 프로그램·서비스 확대, 소통·공감 부모 네트워크 조성·운영, 육아아빠단 사업을 필수로 운영하며, 지역에 맞는 서비스를 추가 개발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과천시

  • 과천시는 육아친화도시 조성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는 단계입니다. 과천시는 전국과 비교했을 때 평균소득이 높고 연령대가 낮으며, 출산율도 1.02명으로 높은 편입니다.
  • 그러나 보육시설 이용률은 매우 낮고, 초등 방과후 돌봄도 부족한 실정입니다. 면적이 좁고 부동산 가격이 높아 인프라 확충이 어렵기도 합니다.
  • 이에 아파트 공동체 내 육아 커뮤니티를 지원하고 돌봄서비스 확대, 육아역량 교육 등을 제공해 육아친화도시로 거듭날 계획입니다.

앞으로 지켜볼 것은?

육아친화마을 조성을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육아친화마을 관련 법률 또는 조례의 제정입니다. 법적 근거가 있어야만 지자체의 책무, 육아친화마을의 방향과 원칙, 기본계획 수립 등 기본적인 틀을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현재 과천시에서 관련 조례 도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중앙정부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조례를 통해 지자체 주도의 사업을 이끄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지자체에 예산을 넘겨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앙 정부이고, 육아친화마을은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교육부 등 다양한 부처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사업이기도 합니다.

지자체와 기존 육아 공동체의 연결도 필요합니다. 공동육아 문화가 형성된 지역은 육아친화마을 사업을 추진하기에도 수월합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육아 공동체는 꾸준한 지원 없이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10년 간 지속돼온 광주광역시 남구의 돌봄공동체 숲속작은도서관은 사업비 부족으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부모들이 내는 소정의 보육비가 있지만 사업을 늘리기엔 부족한 실정입니다.

공동육아 장소라도 지원하기 위해 지자체에서 공동육아나눔터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출산율이 줄어들며 어린이집 수가 줄자 공동육아나눔터 수는 지난 10년간 10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2021년 조사 결과 공적 돌봄 시설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답한 직장 여성은 3.5%에 불과했습니다. 육아나눔터의 접근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서울시 서초구의 공동육아 사업은 지자체의 적극 지원으로 정착에 성공했습니다. 이미 꾸려진 공동육아 모임이 지속될 수 있도록 새로운 구성원 모집을 돕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었고, 지난해에만 3억원의 예산을 편성해 참여자 부담을 덜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저출산 문제를 바라보는 정부의 관점 변화입니다. 저출산에는 교육부터 고용까지, 한국 사회의 문제 전반이 얽혀 있습니다. 저출산의 원인을 바라보는 시야는 점차적으로 넓어졌지만, 전체 구조를 담아내지 못하는 개별 사업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은 여전합니다. 육아친화마을은 공동체의 총체적 변화를 시도합니다. 지자체 단계에서부터 이런 접근법을 시도한다면, 국가 차원의 거시적 해결책을 내놓는 데 힌트가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