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만 바꿔다는 정당들,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앞서 한국 정당들의 계보에서 살펴봤듯, 정당들이 자주 쪼개지고 합치는 것이 한국 정치의 특징이다. 이름이 휙휙 바뀌니 국민들은 혼란스럽지만, 새로 정당을 만들거나 이름을 바꾸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정당 설립의 자유는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 자유다. 문제는 변화무쌍한 정당의 역사 속에서 정치가 과연 얼마나 발전했느냐는 것이다. 정당들은 무엇을 위해 이합집산을 반복했을까?

정당, 왜 이렇게 자주 바뀔까?

가장 큰 원인은 선거다. 선거에서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정당을 합치거나, 이미지 쇄신을 위해 당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 올해 20대 대선 이후 국민의힘·국민의당 합당이 좋은 예시다. 물론  두 당은 지지층과 정치적 성향이 유사했지만, 합당의 가장 큰 이유는 ‘정권 교체’, 즉 선거였다. 이는 당시 합당 선언문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단일화 정신에 의거해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고 공동 정부의 초석을 놓는 탄생을 위해 합당 합의를 선언한다’

국민의힘·국민의당 합당 선언문
  • 이미지 쇄신을 목적으로 당명을 바꾼 사례로는 한나라당 → 새누리당이 있다. 이명박 정부 말기, 한나라당 비대위장이던 박근혜가 이명박 정부와의 거리두기를 위해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변경했다.
  • 1990년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이 이끄는 세 정당이 연합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3당 합당’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민주화 지도자 김영삼과 쿠데타의 주역 노태우의 갑작스러운 연합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오직 선거에서의 유불리였다.
  • 야당 평화민주당을 이끌던 김대중은 훗날 회고록을 통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자신에게도 합당을 제의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정치적 이해관계만 맞는다면 어느 정당이든 개의치 않고 합당이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또 다른 원인은 계파 갈등이다. ‘친O계’와 같은 계파 형성은 한국 정당의 고질적 현상이다. 의견이 맞는 정치인들이 뭉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서 계파가 만들어질 때 중요한 것은 정치적 의제가 아니라 스타성 있는 인물이다. 많은 경우 인물 중심의 계파 형성은 정당의 분열로 이어졌다.

  • 당 내에서 계파들은 선거철마다 후보 공천을 두고 다툰다. 자기네 계파의 후보를 더 많이 내기 위해 경쟁하고, 특정 계파가 당의 권력을 장악하고 다른 계파를 공천에서 완전 밀어내는 ‘공천 학살’이 벌어지기도 한다.
  • 계파 갈등은 당 분열의 씨앗이 된다. 바른정당 창당은 기존의 보수 정당을 개혁하겠다는 목적으로 이뤄졌지만, 분열 전 수 년 동안 계속됐던 친박계(친박근혜계)와 비박계(비박근혜계)의 갈등과 무관하지 않다.
  • 20대 대선과 8회 지선을 연달아 패배한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이재명 의원이 당대표직에 도전할 당시 비이재명계에서 분당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얼마 가지 않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계파 갈등이 정당 안정성에 있어 위험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 2012년 18대 대선에서 역대 최다 의석을 획득했던 통합진보당 역시 계파 갈등으로 분열했다.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건으로 일명 당권파와 비당권파가 대립했고, 결국 비당권파인 심상정, 노회찬, 유시민 등 옛 진보신당계와 국민참여당계 등이 탈당해 정의당을 창당했다.

정당의 무한변신, 무엇이 문제일까?

정당을 만들고 합치는 것, 혹은 정당 명칭을 변경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이는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 권리다. 문제는 정당의 잦은 변화가 정당의 대표성과 책임성을 약화시키고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정당에서 사건사고가 터졌는데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고 당명만 바꾸거나 새로운 당을 창당하는 식으로 정치 생명을 이어가는 일이 한국 정치에서 여러 차례 반복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당들이 창당과 합당, 개명을 반복하면서도 명확한 정치적 방향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정당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보수 정당은 여러 차례 위기를 겪으면서 한나라당과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개명 과정에 정당의 시스템 개혁이나 인적 쇄신이 따라오지는 않았다. 민주당계도 별다른 정치적 쇄신 없이 노무현 정부 말기부터 박근혜 정부 재임기까지 합당과 창당을 반복했다.

계속해서 새로운 당이 만들어졌지만 결국 정당 구도도 양당 구도로 돌아갔다. 유승민 전 의원은 ‘개혁 보수’를 주장하며 바른정당과 새로운보수당을 만들었고, ‘새정치’를 모토로 정치를 시작했던 안철수 의원은 두 차례나 새 정당을 만들었다. 이 정당들은 결국 모두 거대양당과 통합하는 길을 택했다. 진보정당인 정의당은 제3지대를 만들겠다고 수차례 다짐했지만, 몇 년 동안 지지율은 제자리걸음만 반복했고 정치적 비중을 키우지 못했다.

철학도 정책도 없는 정당이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은 스타성 있는 인물의 영입 뿐이다. 정당은 특정 세력의 선거 승리를 위해서 돌아가는, 이른바 선거 전문가 정당이 됐다. 더불어민주당은 대선 패배 이후 ‘추적단 불꽃’의 박지현 활동가를 영입해 비대위원장에 임명했다. 박지현 위원장은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당 지도부 회의에서 여러 차례 무시당하는 경험을 했다고 성토했다. 유권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외부 인사를 영입했지만, 정작 그 인물이 당에 왜 필요한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국민의힘이 신지예 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이수정 경기대 교수를 영입했다가 당 내 반발에 철회한 것도 마찬가지다.

영입의 타당성과 별개로, 앞선 사례들은 현재 정당들의 인재 영입이 대중 유권자에게 호소하기 위해 마구잡이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윤석열 대통령마저도 후보 시절 “민주당은 들어갈 수가 없어서 부득이 국민의힘을 선택했다”고 말한 바 있다. 잘 알려져 있듯, 윤 대통령은 다섯 달 만에 국민의힘에 입당했고, 입당한 지 일 년이 되지 않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앞으로의 정당제, 어떻게 될까?

사실 한국 정당 정치의 역사는 짧은 편이다. 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된 지 70년이 조금 넘었고, 본격적인 민주화가 이뤄진 것도 40년이 채 되지 않았다. 현재 한국 정당 정치가 혼란스럽게 진행되는 가장 큰 이유는 경험 부족이다.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정당 정치도 자연스럽게 성숙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며 좋아질 때를 기다릴 수 만은 없다.

그렇다면 내실 있는 정당 정치를 위해 당장 이뤄져야 할 ‘건강한 변화’는 뭘까. 인물 중심 정치 개선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당 내의 민주적 운영 방식 마련이다. 다시 말해 당원들을 중심으로 당의 의제를 형성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정의당은 올해 당 대표 결선을 앞두고 있고, 여당 국민의힘도 내년 당 대표 경선이 예정돼 있다. 정의당은 당 대표 선출을 통해 당의 새로운 방향성을 설정해야 하고, 국민의힘 신임 대표는 ‘친윤’과 ‘반윤’의 대립을 넘어서 현 정부를 뒷받침할 동력을 마련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 체제의 민주당도 계파 갈등을 해소하고 당원과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세 당이 처한 위기의 원인은 정당의 흐릿한 정체성과 개인에 의존하는 정치 방식에 있다. 두 가지 모두 당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들을 중심으로 결정 구조를 다시 짤 때 해결될 수 있다. 정치인만을 위한 이합집산, 그들만의 리그에서 펼쳐지는 정치를 넘어서야 한다.

by 에디터 이삭🌾

참고문헌

[논문]

곽진영(2009). 한국 정당의 이합집산과 정당체계의 불안정성. 한국정당학회보, 8(1), 115~146.
노기우, 이현우. (2019). 민주화 이후 한국 정당체계는 불안정한가?: 유효 정당 수와 선거 유동성 세분화를 중심으로, 한국정당학회보, 18(4), 5~35.
박경미(2012). 한국 정당모델에 관한 탐색적 연구. 한국정당학회보, 11(1), 31~57.
성병욱(2015). 한국 정당정치의 위기와 변화방향. 대한정치학회보, 23(3), 217~238.
지병근(2016). 한국 주요 정당들의 공천제도와 계파갈등. 동서연구, 28(4), 59~86.

[단행본]

김대중(2010). 『김대중 자서전 1. 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