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타월딩: 외교안보 뉴스레터의 민주주의 실험
외교안보 전문 뉴스레터 델타월딩(Δworlding)의 웹페이지에 들어가면, SF 영화에 나올 법한 비밀기지에 떨어진 기분입니다. 지구를 지키는 비밀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준비돼있고, 각지의 요원들과 접선할 수 있는 비밀 창구도 있습니다. 외교안보라는 단어의 딱딱함과는 거리가 먼 풍경입니다.
델타월딩의 별샛별 디렉터는 우주선 가운데서 홀로그램으로 등장하는 NPC 같습니다. 덜컥 세계의 비밀을 알아버린 여행자에게 ‘당신의 모험은 시작됐다’고 선언하는 방위대장. 미지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열며 여행자를 독려합니다.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별샛별 디렉터와 몇 분만 대화를 나눠보면 기꺼이 함께 떠나고 싶어집니다. 그가 제안하는 모험은, 새로운 담론의 생태계를 조성하는 거대한 세계관의 일부기 때문입니다.
8월의 마지막 날, 별샛별 디렉터를 만나 그의 비밀 임무를 들어봤습니다.
문제 해결 전에 현상 이해부터
어떻게 델타월딩을 만들게 되셨나요?
요즘 솔루션 저널리즘이라는 개념이 뜨고 있죠. 해결책을 제시하는 저널리즘이요. 저는 그 개념이 조금 의문스러워요. 우선 사회 현상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야 해요. 일단 모여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그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델타월딩을 만들었어요. 뭔가를 해야 한다고 제시하기보다 와서 얘기할 수 있는 판을 벌여야 해요.
그렇게 이해해야 할 현상으로 외교 안보로 잡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지금은 국제사회가 중첩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잖아요. 그러니까 외교 안보를 얘기하지 않고 국내 정치를 얘기할 수가 없고, 국내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외교안보 전략도 흔들려요.
델타월딩이 벌인 ‘판’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나요?
댓글창을 만들지 않는 게 핵심이에요. 피드백을 받긴 하지만 선택적으로 공유해요. 우리 입맛에 맞는 것만 보여준다는 게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표현이나 한 쪽에 치우친 의견은 걸러내고 보여주는 거죠.
댓글은 쓰면 끝이잖아요.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아도 돼요. 지금의 온라인 생태계 구조가 그래요. 저희는 과정을 조금 더 불편하게 해서 자기가 하려는 말을 되새김질하게 해요. 보통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게 좋은 미디어라고 하지만 다수결이 민주주의가 아니거든요. 다들 그렇게 인식하고 있지만요.
델타월딩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저는 과학고를 나와서 대학교에선 철학이랑 불문학을 전공했어요. 첫 직업은 대치동 논술 강사였고요. 그러다 큰 사고를 당해 2년 반 정도 병원에 있었어요. 그러다 30대 초반에 다시 사회 복귀를 하려고 하니 경력단절 여성이 되어서 갈 데가 없는 거예요. 대치동으로 돌아가긴 싫었고요.
그래서 콜센터에서 2년 정도 일하다가 30대 중후반에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일하게 됐어요. 되게 늦게 간 케이스인데요. 그 의원이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이었어요. 그 전엔 국방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어서, 북한대학원대학교에 다니며 국제정치를 제대로 배우게 됐죠. 너무 재밌었어요.
일관성도 없고 불안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그냥 아무거나 막 하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 밀려오는 생을 다 충실하게 살고 30대에 내가 뭘 하고 있으면 ‘이게 내 일이다’ 생각하고 정진하자고 마음먹었어요.
함께 일하는 분들도 외교안보 전공자인가요?
아뇨. 지금 남아있는 사람도 그렇고 거쳐간 분들도 전공이 다양했어요. 철학 전공, 체육 전공, 디자인 전공…
그 분야의 전문가인 것보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가’ ‘왜 하는가’ 이 두 가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떻게 잘 전달할 건가 고민해야죠. 글 쓰는 건 훈련하면 돼요.
외교안보, 이론과 함께라면 더 쉽다
‘외교안보’는 정치의 여러 영역 중에서도 비전공자에게 특히 어려운 분야로 느껴집니다. 델타월딩만의 접근법이 있을까요?
세 가지 방식이 있겠죠. 우선 사건을 그냥 설명해 주는 것. 이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두 번째는 전문가 의견을 가져오는 것. 마지막이 저희 방식인데, 이론을 기반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국제 정치의 핵심 이론이 몇 가지 있거든요. 물론 그걸 드러내진 않죠. 접근은 학술적으로 하되 쉽게 푸는 거예요.
이론을 기반으로 접근할 때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사건의 추이가 보이는 거죠. 사건만 따라가게 되면 새로운 변수가 생겼을 때 앞에서 한 얘기들이 부정되기도 해요. 근데 이론을 베이스로 가면 어느 정도 가늠이 돼요.
프리고진 사망을 예로 들어 볼게요. 지난 6월에 프리고진이 바그너그룹을 이끌고 러시아로 들어갔잖아요. 사건만 놓고 보면 이제 프리고진이 러시아를 함락할 것이고 푸틴은 끝났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독재 체제라는 게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 있거든요.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기존 권력을 대체할 내각이 있어야 해요. 푸틴과 프리고진의 대결을 말하려면 바그너그룹에 푸틴을 대체할 내각이 있는지부터 질문해야 해요. 병력 수를 비교할 게 아니라요. 그런데 내각이 있다는 근거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바로 프리고진이 꼬리를 내렸죠. 푸틴과 프리고진이 같은 위치에서 대결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이론을 기반으로 하면 이렇게 예상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외교안보 분야는 적극적으로 변화를 만들기보단, 외부에서 사건이 터지면 평가하고 대응하는 것 중심이라는 편견이 있는데요.
일리 있는 말이에요. 한국은 독자적인 외교안보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없었던 국가예요. 미군정, 냉전,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1강 구도를 거치면서 무역이든 외교든 평이하게 흘러갔어요. 물론 베트남 전쟁이나 오일 파동 같은 변곡점이 있었지만 한국이 풍파를 겪을 대전환은 거의 없었죠. 그러니까 굳이 앞서 나갈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 이후, 이르게 보면 9.11 이후부터 국제정치가 큰 틀에서 바뀌었어요. 우리는 이 변화를 너무 늦게 인지했고요. 국내에서 그게 인식된 게 사드 때에요. 중국이라는 변수를 처음 경험하면서 미중구도 하에서 한국의 역할을 고민하게 된 거죠. 한국의 국익이 무엇인지 되물으면서 외교안보 전략을 수립할 때가 됐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됐어요.
물론 정권 단위로 보면 새롭고 탁월한 전략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큰 틀에서 세계가 바뀔 때 한국이 어떤 파트너십을 가져갈 것이고 외교 무대에서 목소리를 키울 건지, 청사진을 가진 적이 없다는 거죠. 한미동맹에만 잘 편승하면 됐으니까요.
델타월딩은 단순한 뉴스레터 서비스가 아닙니다. 별샛별 디렉터가 공론장과 민주주의의 형태를 실험하는 플라스크 중 하나입니다. 또 다른 플라스크는 지식 커뮤니티 시에라 소사이어티입니다.
진짜 공론장 만들기
시에라 소사이어티는 델타월딩과 무엇이 다른가요?
온라인 공론장이 무너진 이유는 구심점의 부재에요. 어떤 의견은 위험하다고 말해줄 모더레이터(중재자)가 필요해요. 온라인 커뮤니티에 누가 모더레이터를 하겠어요. 그걸 자경단처럼 할 수는 없어요. 여론 정치도 위험하거든요. 미디어를 하겠다는 사람이라면 책임감을 갖고 모더레이터 역할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걸 쉽게 표현하면 ’독재’죠. 델타월딩은 우스갯소리로 ‘별샛별 독재’에요.
반면 시에라 소사이어티는 열려 있어요. 기획은 우리가 하지만 피드백이 오면 적극 반영하고, 투표로 결정하기도 해요. 참여자 수가 적고, 책임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분들이 많아서 믿고 할 수 있는 거죠.
델타월딩과 시에라 소사이어티로 민주주의가 어떤 형태로 굴러가야 할지 실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델타월딩은 저희가 글을 써서 보내는 구조고, 시에라 소사이어티는 글이 저희에게 오는 구조거든요. 각각의 특성에 맞는 거버넌스를 구현하고 있는 거죠.
시에라 소사이어티는 외교안보 외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던데요.
총 12개의 코스가 있고,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다뤄요. 첫 번째는 역시 외교안보인데요. 일단 국제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고 사람들과 대화도 하고 싶은 분들을 위한 <정통 외교안보> 코스가 있어요. <세계지도 다시 그리기> 코스에선 매 시즌마다 특정 키워드를 갖고 외교안보를 바라봐요. 지난 시즌에는 중국을 다뤘고, 이번엔 전쟁을 다뤄요. <세계, 루트파인딩>에서는 문재연 한국일보 기자와 함께 이코노미스트를 읽어요. 망원경처럼 전체를 보는 코스죠.
두 번째 주제는 한국 사회에요. 외교와 내치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한국 사회를 깊이 있게 이해하자는 거예요. 지속가능성, 미디어·빅테크, 정책을 다뤄요. 이번엔 중산층을 키워드로 한 프로그램도 진행해요. 상위 몇 퍼센트가 민주주의를 좌지우지한다는 신화가 있지만, 투표장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은 중산층이에요. 누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지 보려면 중산층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어요.
마지막 주제는 '나'라는 사람이에요. 내가 없이 세계는 없어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측면에서 창의력 키우기, 글쓰기, 갈등 디자인 같은 코스를 운영하고 있어요.
마법 학교는 내 생각과 감정을 풀어내는 법을 배우는 학교에요. 정보 수집 및 정리(인풋), 문제 해결 역량 강화(연산), 표현(아웃풋)의 3단계로 이뤄져요. 이번 시즌엔 스타트업 만들기를 주제로 진행했어요. 변화는 결국 문화가 바뀌어야 찾아와요. 한국은 다른 얘기, 새로운 얘기가 나오기 어려운 문화에요. 다르고 새로운 게 늘 옳은 건 아니지만 그런 얘기가 계속 나와야 뽑아서 쓸 수 있거든요. 그걸 연습하는 곳이에요.
커뮤니티에 필요한 것: 재미와 규칙
어떤 분들이 참여하시나요?
주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 여성이 조금 더 많아요. 외교안보 전공자가 30% 정도고요. 참여자들 간 공통점이 별로 없어요. 직업군도 거주 지역도 다양해요. 그래도 공통점이 있다면 막연히 많이 알기보단 정확하게 알고, 나만의 단단한 관점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란 거예요.
자유롭게 의견을 풀어놓다 보면 갈등도 있을 것 같은데요.
거듭 얘기하지만 모더레이터가 중요해요. 어떤 커뮤니티든지 전문가가 함께 있어요. 단순히 유명한 분들이 아니라, 이론과 현장의 경험을 모두 갖춘 분들이에요. 치우쳐서도 안돼요. 나와 다른 의견도 들어야 되고 이것만이 옳다고 얘기하지 않고요. 극단적인 주장이 나올 수 없는 구조에요. 또 돈 내고 오시는 분들이잖아요.(웃음) 온라인에서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말을 여기 와서 하진 않겠죠.
주제가 무겁고 어려울 텐데 커뮤니티 분위기는 어떤가요?
무거운 주제를 다루다보니 분위기도 처질 수 있죠. 그래서 피그마라는 툴을 사용해요. 메모장도 쓰고, 그림도 그려서 공유할 수 있어요. 좀 더 놀 수 있는 느낌이죠.
참여자들이 무엇을 얻어가길 바라시나요?
그냥 잘 놀았으면 좋겠어요.
정치는 ‘놀면서’ 얘기하기 참 어려운 주제죠. 정치 이슈를 보면 화를 내거나 무력감을 느끼게 될 때가 많잖아요.
저는 이렇게 마음먹어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해요. 한 번에 모든 걸 다 하려고 하면 내가 먼저 넘어져요.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거죠. 그다음에 또 할 수 있는 게 보이면 하면 되는 거예요. 캠페인을 할 수도 있고 시민단체를 지원할 수도 있겠죠.
운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를 하나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커뮤니티가 어디까지 포용할 지 결정하는 게 참 어려워요. 시에라 소사이어티에도 주의를 요구하는 분이 있었어요. 그분이 명백하게 물리적인 위협을 가한 건 아니지만, 문제가 될 가능성이 다분한 징후들이 보였어요. 그래서 주의를 몇 번 드렸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결국 선제적으로 하산 조치를 했어요. 그러자마자 다른 참여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공유했고요.
여기서 끝내지 않고 한 달 뒤에 반상회를 열었어요. 그 사건을 접하면서 느낀 바를 공유했죠. 그때 모임 등록창에 시에라 소사이어티에서 반드시 지켜야 될 규칙들이 항상 안내됐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 시즌부터는 등록 마지막 장에 규칙을 반드시 소리 내 읽게끔 해놨어요.
사실 이렇게 진입 장벽이 있으면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요. 하지만 우리가 만들려는 건 사회이고, 그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정답은 우리도 몰라요. 하지만 실험 정신이 있기 때문에 참여자들과 계속 소통하고 변화를 만들어요. 결론은 정답이 있다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바뀐다는 거예요.
비영리적 목적을 가졌음에도 영리단체로 남아있길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영리적으로 안착이 되어야 나중에 우리는 실패하더라도 뒤이어 나오는 단체들이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어요. 델타월딩의 지속 가능성이 아니라 이 분야 자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영리적으로 풀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