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김어준, 마이클 무어를 말하다
《팝콘폴리틱스》는 문화콘텐츠에 나타나는 정치적 배경을 ‘덕력’ 넘치는 시각으로 파헤쳐보는 콘텐츠입니다.
글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 때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원칙을 꼽자면, 결국 중요한 것은 ‘독자나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다. 감정에 호소할 수도 있고, 논리로 설득할 수도 있다. 방법이 무엇이든 결국 제작자의 목표는 이야기를 전달해 관객이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는 천재라고 할 수 있다. 무어는 관객을 끌어당겨서 자신에게 동의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누구보다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는 감독이다.
하지만 동시에 마이클 무어는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 감독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서 '미국의 김어준' 같은 사람이라고 할까? 《화씨 9/11》, 《식코》와 같은 무어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중립성 따위는 내던져버린 것 같지만, 어쨌든 영화는 정말 재미있고 쉽다.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는 어느새 그의 세 치 혀에 홀랑 넘어가 버리고 만다. 도대체 마이클 무어는 누구일까? 무어는 어쩌다 미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감독이 됐을까?
부시에서 트럼프까지, 공화당 '담당 일진'
무어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화씨 9/11》(2004)이다. 9/11 테러를 겪은 부시 행정부가 얼마나 성급하게 대책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지 비판할 뿐만 아니라, 9/11 테러에 부시 대통령이 연관돼 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하며 부시를 조롱하는 영화다. 선거 기간 개봉했던 만큼 부시의 재선을 막겠다는 의도가 다분한 영화였다. 때문에 누군가는 그의 영화를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정치적 프로파간다’라고 비판했지만, 매운맛을 잔뜩 섞은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이후에도 무어는 정치적 성향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비판한 《식코》(2007), 미국 기업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자본주의: 러브스토리》(2009)가 대표적이다. 비교적 최근인 2018년에는 《화씨 9/11》의 시퀄 영화인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를 개봉한다. 《화씨 11/9》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이 도대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에 관한 영화다.
무어는 영화를 통해 이라크 전쟁의 부시를 비판하고, 미국의 기업화된 의료를 비판하며, 트럼프 당선에 대해 느끼는 절망감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그를 그야말로 ‘극혐’하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마이클 무어를 미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영화 감독으로 만드는 건 그의 정치성향이 아니다. 문제는 마이클 무어가 사실과 현상을 다루는 방식이다.
마이클 무어, 위험하고도 매력적이다
마이클 무어는 자기의 주장에 부합하는 사례들을 잘 골라서 다큐멘터리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식코》에서 미국의 의료 체계를 비판하면서 영국이나 유럽 국가들의 의료보험제도를 모범 사례로 드는데, 일각에서는 무어가 다른 나라들의 의료보험 제도에서 좋은 것들만 골라와 마치 유토피아인 것처럼 묘사했다고 비판한다. 사실을 절묘하게 왜곡하는 경우도 많다. 같은 영화에서 쿠바의 병원을 모범 사례로 소개하는 데, 영화에서 소개하는 병원이 사실은 쿠바 국민들은 이용하지 못하는 외국인 전용 병원이었다.
무어는 장면과 사실을 가져와 조각보처럼 이어붙여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데 능숙하다. 가령 트럼프 앞에서 “미국!”을 연호하는 미국인 군중들을 보여주고, 유대인을 탄압하는 나치 독일 경찰들을 보여준 다음, “더러운 검둥이”, “역겨운 중국인”, ‘시민권자 맞냐’는 혐오발언을 쏟아내는 미국인들을 다시 보여주는 식이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트럼프를 히틀러에, 반이민 혐오주의자들을 나치에 연상시키게 된다.
또 무어는 짧은 장면들을 이어붙여 휙휙 넘기는 방식의 이야기 전개를 좋아한다. 분노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거나, 정치인들의 헛소리를 계속해서 이어붙여 관객들을 열 받게 하는 식이다. 이처럼 무어의 다큐멘터리 전략은 논리적 설득이 아닌 감정적 동조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무어의 결과물은 완성도가 높으며, 또 보는 사람을 휘어 잡는 무언가가 있다. 또 무엇보다 정치에 대해, 미국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논리적으로 왜 그런지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게 되곤 한다.
다큐멘터리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 과정에서 주관이 개입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는 다큐멘터리가 중립적이고 논리적인 증거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무어는 이 기대에 연연하지 않으며, 무어가 가장 비판받는 지점도 이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 객관성을 포기하는 것이 옳은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 혹은 세상의 진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진실의 경계에서 영화를 도구로 사용하기
무어는 허프포스트에 게재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큐멘터리인’이 아니라 ‘영화인’이다. 마틴 스콜세지도 ‘픽션인’ 같은 단어로 자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다큐멘터리인’이라는 없는 말을 제조해 우리 자신을 묘사하는가?”라고 말한다. 즉, 마이클 무어는 스스로 다큐멘터리언이라는 틀 안에 가두기를 거부하고 있다.
무어는 내레이션을 하며 거리낌 없이 영화 속 사실에 자신의 상상과 주장을 섞어 넣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9/11 테러가 벌어지던 순간 조지 부시 대통령은 플로리다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테러가 발생하고 ‘미국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좌관으로부터 전달받은 부시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7분 정도 자리에 머물다 자리를 떴다. (이후 부시 측은 바로 자리를 뜨지 않은 이유에 관해 ‘갑자기 자리를 뜬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동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해명했다.)
《화씨 9/11》에서 무어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부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왜 가만히 앉아있었을까요? 어쩌면 부시는 빈 라덴 가문과 자신의 유착관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까요?’라고 말한다. (실제로 부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명문가였던 빈 라덴 가문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렇게 해서 무어는 독자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실 이 모든 건 부시 대통령의 계획이었을지도 몰라. 사실 그런 것 같지 않아?'
실제로 부시가 테러의 배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서 무어가 이런 이야기를 구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무어는 그렇게 보여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의 영화를 통해 부시는 “3천 명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은 테러의 진상을 밝히는 것보다 자신과 사우디의 유착관계를 감추는데 급급했고, 끝내는 미국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는 늪으로 끌어들인 멍청한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만다. 무어는 자신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을 깎아내리고 조롱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무어는 작품에서 냉철한 관찰자에 머무르지 않고 다큐멘터리의 스토리 구성에 직접 참여한다. 다큐멘터리의 원칙은 ‘대상과의 거리 두기’지만, 무어에게 그런 원칙은 갑갑한 허울일 뿐이다. 초기 작품인 《로저와 나》(1989)는 공장 폐쇄로 대량 실업자를 발생시킨 GM의 사장을 만나겠다며 무어 본인이 직접 찾아다니다 끝내 성공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영화 자체의 줄거리다. 2014년 무어의 고향이기도 한 미시간 주 플린트에서 오염된 수돗물을 마시고 주민들이 납에 중독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에서 무어는 ‘납 오염은 해결됐다’고 주장하는 주지사 공보실장을 찾아가, 플린트에서 직접 떠 온 수돗물 한 컵을 주며 “마실 수 있냐”고 묻는 장면도 나온다. (공보실장은 ‘어디서 가져온 건지도 모르는 물을 마실 수는 없다’며 거절한다) 이후 무어는 물탱크차를 끌고 가 미시간 주지사의 집 앞마당에 물을 퍼부으며 사태를 방관한 정치인들을 조롱하고 비난한다.
이처럼 다큐멘터리의 금칙을 깨뜨리면서 마이클 무어는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지울 뿐만 아니라 사실과 주관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그의 영화는 사람을 논리로 설득하기보다 내레이터의 이야기를 '믿게' 만든다. 좋든 싫든 이 전략은 제법 잘 먹혔고, 마이클 무어는 군중 장악력이 가장 뛰어난 영화감독으로 자리잡았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한 사람…
마이클 무어를 보고 있자면 한국인들은 자연스럽게 김어준을 떠올리게 된다. 김어준은 영화 감독이나 예술인이 아니고 언론인이지만, 그는 인터넷 신문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딴지일보>를 만들고 거침없는 실험적 시도로 많은 이들의 열광을 얻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무어를 미국의 김어준이라고 말하며 둘을 비교한다. (아마 김어준 본인도 마이클 무어를 레퍼런스로 삼지 않았을까?)
오늘날 김어준은 왜곡 보도와 편향성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조국 사태나 민주당의 연이은 성폭력 폭로 사태 속에서 “냄새가 난다”며 음모론을 제기하는 김어준을 보수 측은 “개코”라면서 비웃었다. 수많은 비판을 받고 있으면서도 김어준은 오늘날 진보진영에서 가장 지지받는 언론인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뉴스 진행자이다. 김어준은 편향된 보도를 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점에서 어쩌면 마이클 무어와도 닮아있다.
물론 공영방송에서 시사 뉴스를 진행하는 언론인과 예술활동을 하는 영화인을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사실 두 사람이 보인 행보의 질적 수준이 같다고 보기도 힘들다. 하지만 둘의 행보를 보면서 거칠지만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어디까지 편향될 수 있을까?
글 애증의 정치클럽 이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