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 PD? 운동권 갈등 총정리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전두환)의 대척자는 이태신(장태완)입니다. 야망에 찬 부패한 군인과 주어진 임무에 충실한 군인의 대립이 그려지죠.
실제 역사에서 군부에 대항한 주체는 이태신 장군처럼 의로운 군인 뿐만이 아닙니다. <서울의 봄>은 본래 80년대 활발하게 전개된 학생운동을 일컫는 말입니다. 민주화의 주인공은 시민이었고, 그중에서도 격렬하게 투쟁한 것은 대학생들이었습니다.
이 시기 운동권 출신의 정치인들은 현재 ‘586’이라는 이름으로 묶입니다. 주로 민주당과 진보정당에서 활동하죠. 특히 진보정당의 경우 학생운동에 뿌리를 두고 정당의 이념과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즉, 진보정치에 있어 학생운동의 전통은 여전히 어떤 인물의 경력을 설명하는 것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학생운동에서 시작된 논의가 40년간 그 모습을 바꾸며 진보정치를 이끌어왔죠.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죠. 그래서 <근본적 정치 탐구> 진보정치 2편에서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아주 중요한 논쟁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현재 진보정치가 서 있는 곳과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들을 살펴보기에 앞서서요.
80년대, 새로운 논의의 시작
80년 5월 17일,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는 비상 계엄을 확대해 정권을 장악합니다. 박정희 정권이끝나고 민주화를 기대하던 시민들은 또 다른 군부독재를 맞이하게 됐죠.
그리고 바로 다음날,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운동권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군사정권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자행할 수 있는지 확인한 학생들은 보다 근본적인 고민을 품게 됩니다.
이전까지 학생운동은 체제 유지를 전제로 한 민주화를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5.17 쿠데타와 광주 학살을 계기로 민주화 이상의 체제 변화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제기됐습니다.
그 시작은 당시 한국 사회의 구조를 새롭게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학계에선 다양한 이론이 만들어졌고, 운동권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각 이론의 경쟁이 심화되며 운동권 내에선 어떤 이론을 수용하느냐에 따라 파벌이 나뉘었습니다. 이를 사회구성체 논쟁이라고 합니다. 이후 운동권과 진보정치의 역사는 이때 발생한 정파 간 갈등의 궤적을 따라 흘러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현재까지 거론되는 NL·PD 논쟁인데요.
사회구성체 논쟁은 크게 4개의 시기로 나뉩니다.
준비기(1980~83년)
1️⃣ 서울역 회군
- 80년 5월, 박정희 대통령 암살로 민주화 운동이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때 운동권 내 의견차가 발생했습니다. 시위를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견과 시위가 쿠데타의 명분이 될 수 있으니 후퇴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붙었는데요.
- 결국 15일 서울역에서 10만명 규모의 시위 중 해산이 결정됐습니다. 이를 서울역 회군이라고 합니다.
- 3일 뒤 광주 학살이 벌어졌고, 그해 9월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운동권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2️⃣ 무림-학림 논쟁
- 이후의 대응 방식을 두고 무림과 학림이라는 집단 간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서울역 회군에서의 입장차가 되풀이됐습니다.
- 무림은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 집단으로, 당분간 시위를 자제하자는 준비론을 주장했습니다. 학생운동 세력이 민주화 운동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므로, 지속 가능한 장기적 계획을 짜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 학림은 회군에 반대한 집단으로, 곧장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는 직접투쟁론을 주장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무림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했고, 학생운동이 투쟁을 지속해 운동을 확장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1단계 논쟁(1984~85년)
1️⃣ 사회구성체 논쟁의 시작
사회구성체란 당시부터 널리 읽히게 된 마르크스의 개념입니다. 이를 받아들이며 학계에서 한국 사회의 구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크게 두 축으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기득권과 노동자 간 모순과 외세와 식민지 간 모순 중 무엇이 한국의 핵심 문제인가가 쟁점입니다.
- 주변부 자본주의론: 아직 한국은 서구 주변부의 사회이기 때문에 미국과 일본이라는 외세의 억압으로 발생하는 모순이 더 크다는 입장입니다.
- 국가독점자본주의론: 국내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로 인한 모순에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한국이 외세에 종속적이긴 하지만, 한국 사회의 문제는 결국 국가가 자본을 독점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봤습니다.
이러한 학계에서의 논쟁이 학생운동 세력에 이식되며 사회구성체 논쟁이 확대됐습니다.
2️⃣ CNP 논쟁
운동권에서 본격적인 사회구성체 논쟁이 시작됐습니다. CDR, NDR, PDR이라는 세 가지 이론이 중심이었습니다. 이들 간 갈등을 각 이론의 앞글자를 따 CNP 논쟁이라고 합니다.
CDR (Civil Democratic Revolution, 시민민주혁명)
- 한국 사회 규정: 주변부 자본주의
- 운동 주체: 현재 상황에 문제를 느끼는 모든 사람들 = 시민
NDR (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민족민주혁명)
- 한국 사회 규정: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식민지의 종속성과 자본주의의 독점이 결합.
- 운동 주체: 제국주의와 독점 자본(전두환 정권)에 피해를 입은 노동자, 농민, 청년 등의 ‘기층민중’ → 중간계급은 연대 가능하지만 주도 세력 x
PDR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중민주혁명)
- 한국 사회 규정: 국가독점자본주의
- 운동 주체: 노동계급 → 중간계급 제외
CDR은 모든 시민을 아우르려 해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회피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PDR은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에만 집중해 한국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세 정파 중 다수파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문제를 모두 조명한 NDR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측면을 모두 다뤘기에 비판이 뾰족하지 못하다는 문제가 있었고, 그 때문에 NDR 내에서도 정파가 나뉘었습니다.
2단계 논쟁(1986~89년)
1️⃣ 주체사상의 수용
- NDR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전개되던 중, 강철서신이라 불리는 팜플렛이 대학가에 배포됩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소개하고 미국의 제국주의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 주장하는 글이었습니다.
- 이 문서에 영향을 받아, NDR 내에서 반미, 반제국주의 운동을 우선시하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그중 주체사상을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을 주사파라고 합니다.
2️⃣ NL-CA 논쟁
NDR에서는 민족, 민주, 민중 세 가지를 강조하는 삼민투(삼민투쟁위원회)를 주도해왔습니다.
그러나 반제국주의 운동의 우선순위를 두고 갈등이 발생했고, 삼민투는 자민투(자주민족투쟁위원회)와 민민투(민족민주투쟁위원회)로 분열됐습니다.
86년부터 자민투와 민민투는 학생운동 주도권을 둔 세력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자민투는 NL, 민민투는 CA라는 집단으로 발전합니다.
NL (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
- 한국 사회 규정: 식민지 반봉건사회(미국 제국주의의 식민지) → 모든 문제의 원인은 미국 제국주의
- 운동 주체: 민족해방에 연대할 수 있는 모든 세력 → 반미, 민족통일 우선시
CA (Constitutional Assembly, 제헌의회)
- 한국 사회 규정: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 운동 주체: 노동계급 → 민주화 나선 보수파와의 연대 X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북한과 미국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민주화 방식에 있어서는 NL은 직선제 개헌 주장에 머물렀고, CA는 아예 헌법을 바꿔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운동 방침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NL은 민족해방을 위해선 가능한 많은 세력이 연대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운동 주체를 좁게 설정한 CA가 대중성이 떨어진다며 비판했습니다. 반면 CA는 반미운동에 초점을 둔 NL이 민주화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결국 주도권을 잡은 것은 대중성을 지향했던 NL이었습니다.
3단계 논쟁(1989년 이후)
1️⃣ CA 분열
- CA가 1988년 해산하자, 그중 다수는 NL에 흡수됐습니다. 이들은 NL 내에서 주체사상을 지지하지 않는 비주사파로 자리잡게 됩니다.
- 남은 이들은 과거의 NDR 노선을 유지해 ND(National Democracy)라고 불렸습니다.
2️⃣ NL-PD 논쟁
CA가 약해지자 NL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했습니다. 바로 PD입니다. PD는 80년대 중반 구성된 정파로 CA의 관점이 한국의 특수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PD (People's Democracy, 민중민주)
- 한국 사회 규정: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 민족이 아닌 계급 문제가 핵심
- 운동 주체: 노동계급
PD는 NL과 달리 마르크스, 레닌의 사회주의 이론에 뿌리를 두었습니다. 미국 제국주의보다 자본주의 문제에 초점을 두었고, 노동운동과의 연계를 중시했습니다. 공장에 위장 취업해 노조를 만드는 게 대표적인 활동이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거리를 두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사회구성체 논쟁의 큰 줄기는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가 민족과 계급 중 어디에 놓여있는지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최근의 구도인 NL-PD 논쟁 역시 그렇습니다. NL은 민족, PD는 계급을 중시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 분단, 군사독재 정권의 국가 주도 경제, 미국의 영향이라는 한국의 특수성 때문에 두 가지 모순은 공존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를 통합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사회구성체 논쟁의 모든 이론에는 역사를 단일한 관점으로 해석하려 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구성체 논쟁은 90년대 초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 80년대 후반 실존하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면서 논쟁의 기반이었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회의가 퍼졌습니다.
- 정파 갈등이 격해지면서 논쟁이 현학적, 추상적으로 변했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 민주화라는 목표를 이뤘기에 학생운동의 규모 자체가 줄어들기도 했습니다.
- 민주화 이후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운동이 필요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진보정당 내에는 NL 계열, PD 계열이라는 구분이 존재합니다. 지난 편에서 살펴봤듯 진보정당이 겪어온 부침의 중심엔 해소되지 않은 두 정파의 갈등이 있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진보정치에서 NL과 PD의 구분은 분명 80년대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틀이 남아있다면,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까요? 변화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근본적 정치 탐구> 진보정치 마지막 편에선 동시대 진보정치에 남아있는 정파 갈등의 흔적을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