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공영방송?
<근본적 정치 탐구> 언론장악 2편입니다.
1편에서는 박정희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의 언론 정책을 살펴봤습니다. 독재 정권에서의 언론 장악 기술을 정리하고, 민주화 이후 언론계의 변화와 정치권과의 상호작용을 다뤘는데요.
전편에서 확인했듯, 정부에 유리한 언론 환경을 만들기 위한 시도는 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공영방송 인사 교체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됐습니다. 언론장악의 역사는 곧 공영방송 쟁탈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윤석열 정부의 언론 정책 논란 역시 공영방송에 집중돼 있습니다.
이번 편에선 1️⃣공영방송의 지배구조과 2️⃣이를 이용한 정치권의 다툼, 3️⃣그간의 공영방송 개편 시도와 실패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공영방송은 시장과 정치권력에서 독립해 공공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송을 말합니다. 국내의 공영방송으로는 KBS, MBC, EBS가 있습니다. 이들은 공공성 보장을 위해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의 관리를 받습니다. KBS의 경우 재원을 공공에서 조달하기 위해 수신료를 받아왔습니다.
- KBS: 방통위가 이사를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이렇게 구성된 이사회가 사장 후보를 추천하면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위원회(방문진)이 이사회 역할을 하며 사장 임명·해임권을 가집니다. 방문진은 9명의 이사와 1명의 감사로 구성됩니다. 방문진 임원은 방통위에서 임명합니다.
이러한 구조가 정착된 것은 민주화 이후입니다. 1987년 방송법을 제정하면서 방송위원회(2008년 방통위로 개편)를 설치해 독립적 권한을 부여해, 방송 사장을 민주적으로 임명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선임 과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비공식적 관행은 지속됐습니다. 이사회의 여권 추천 인사와 야권 추천 인사 비중은 법적 근거가 없음에도 유지돼 왔습니다. KBS는 여야 7:4, MBC는 6:3의 비율을 지켜왔습니다. 즉, 현 공영방송 지배구조는 친정부 인사를 사장으로 임명하기에 유리합니다.
*YTN은 준공영방송이었으나 최근 민간 기업에 매각돼 민영화됐습니다.
사장은 정부 마음대로?
각 정권은 이를 이용해 전 정부에서 임명한 사장을 현 정부에 친화적인 인사로 교체해 왔습니다.
노태우 정부
- 노조에 협조적이던 KBS 서영훈 사장 해임, 유신 시절 청와대 대변인 지낸 서기원 사장 임명
노무현 정부
- KBS 사장으로 2003년 노무현 정부 언론고문을 지낸 서동구 임명, 정치적 중립성 확보 어렵다는 이유로 노조가 크게 반발해 8일 만에 자진 사퇴
이명박 정부
- YTN에 이명박 캠프 언론특보 출신 구본홍 사장 임명
- KBS 정연주 사장 특별감사 진행해 방만 경영을 이유로 해임 요구 → 야권 이사 2명 자진 사퇴 + 1명 해임으로 이사회 여야 구도 6:5 역전 → 감사 3일 만에 사장 해임 의결 → 이명박 캠프 언론특보였던 김인규 사장 임명 → 2012년 대법원 해임 무효 판결
-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 선임된 MBC 엄기영 사장에게 자진 사퇴 압박 → 김재철 사장 임명
문재인 정부
- KBS 고대영 사장 경영 실패와 개인비리 의혹으로 해임 요구 → 야권 이사 1명 자진사퇴, 1명 해임해 여야 구도 6:5 역전 → 해임 의결 → 2023년 대법원 해임 무효 판결
윤석열 정부
- KBS 김의철 사장 경영 악화, 불공정 방송 이유로 해임 요구 → 야권 이사 2명 해임해 여야 구도 6:5 역전 → 해임 의결 → 법원이 해임 집행정지 신청 기각하며 해임 유지
- 방문진 권태선 이사장 해임 → 법원이 해임 집행정지 신청 받아들여 복귀→ MBC 사장 교체 어려워짐
공영방송 지배구조, 바뀔 수 있을까
공영방송이 정권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그 지배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예전부터 나왔습니다. 정권이 공영방송의 인사들을 마음대로 뽑거나, 자르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정치권에서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들이 지금까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고 있냐에 따라 양당의 입장이 늘 번갈아 뒤바뀌어 왔다는 겁니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취약성은 야당에게는 견제의 대상이지만, 여당에게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입니다.
지금의 공영방송 지배구조가 만들어진 이명박 정부 이후로, 박근혜 정권부터 현재까지 굵직한 공영방송 개편 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박근혜 정부
민주당(야당): 공영방송 개편 찬성 vs 새누리당(여당): 개편 반대
2016년 7월,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의원 162명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공동 발의했습니다. 당시 박홍근 민주당 공정언론특별위원장이 법안을 주도해, ‘박홍근 안’으로 불렸습니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각 공영방송 이사 13명으로 확대, 여당 7명, 야당 6명 추천
여야가 이사진을 추천하는 건 법적 근거가 없는 관행이었는데, 박홍근 안은 이를 법적으로 명문화했습니다. 대신 이사진 비율이 여당에 압도적으로 기울어 있던 관행에서 야당의 추천 비율을 대폭 높였습니다. 이사진 구성에서 정치적 입김을 아예 배제할 수 없다면 정치적 균형을 맞추자는 취지입니다.
2️⃣ 특별다수제
사장을 임명·해임할 때 이사진의 3분의 2 이상 찬성을 거치게 하는 것입니다. (기존 조건은 과반수 찬성) 사장을 교체할 때 여당이 반드시 야당 추천 이사들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취지입니다. 영국, 독일, 일본 등 해외 선진국들도 대부분 특별다수제를 택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
민주당(여당): 개편에 소극적 vs 자유한국당→국민의힘(야당): 개편 주장
- 2017년 5월 정권이 교체되자, 양당의 입장이 뒤바뀝니다. 자유한국당·바른정당은 ‘박홍근 안’ 처리를 촉구하고 나섭니다. 야당 추천 인사를 늘리는 ‘박홍근 안’이 야당이 된 자유한국당·바른정당에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 반면 여당이 된 민주당은 돌연 개정안 처리를 망설입니다. 2017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은 ‘박홍근 안’에서 ‘온건하지만 소신 없는 사람’이 사장으로 선출될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민주당 내에선 ‘박홍근 안’에 시민 참여까지 포함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 결국 민주당은 ‘박홍근 안’의 대안을 검토해 보겠다고 선언합니다. 방통위와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국민 추천 이사’, ‘국민 추천 사장 후보’를 포함한 대안을 냈지만,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습니다.
-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이 2020년 민주당의 ‘박홍근 안’과 거의 같은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윤석열 정부
국민의힘(여당): 개편 결사반대 vs 민주당(야당): 개편 적극 추진
이번에는 국민이 나서면서 개편안 추진이 급물살을 탑니다. 2022년 11월,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법률 개정을 요구하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5만 명을 넘기면서, 국회 상임위에 자동으로 상정됐습니다. 민주당이 소속 상임위인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에서 해당 법안을 단독 의결로 통과시켰습니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박홍근 안’보다 전문가 집단과 시민의 참여 강조
공영방송 이사를 21명으로 늘립니다. 국회에서 5명(교섭단체 의석수에 비례)을 추천하고 나머지는 미디어 관련 학회(6명), 시청자위원회(4명), 방송기자협회·한국PD연합회, 방송기술인연합회(각각 2명)에서 추천합니다. 국민의힘은 방송 및 미디어 단체와 노조가 친민주당 성향이라며 반발했습니다.
2️⃣ 국민 100명으로 구성된 ‘사장후보국민추천위원회’에서 사장 후보 2~3명을 추리고, 이사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임명
특별다수제에 국민 참여를 추가한 방안입니다. 국민의힘은 소수 국민의 참여로 공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법안이 국민의힘의 저지로 법사위에서 계류되자 민주당은 다시 한번 단독 의결로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했습니다. 그러나 본회의에서 통과되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언론노조 윤창현 위원장은 여야가 공영방송 개편에 합의하려면, 양당이 유불리를 가리기 어려운 대선 1년 전쯤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윤석열 대통령도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편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문재인 정부는 집권 후 제대로 된 입법 노력을 보여주지 않았고 윤석열 정부는 수신료 폐지가 개혁 방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윤 위원장의 말처럼, 선거를 앞두고 나오는 공영방송 개편 논의는 구체성도, 실현 가능성도 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치적으로 흔들리기 쉬운 공영방송 지배구조의 문제는 방송의 정체성과 직결됩니다. 방송 제작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으면서, 공영방송의 목표를 제대로 논의할 수 없게 됩니다. 공영방송의 목표란 공공성을 실현하는 것이고, 무엇이 공공성인지 정의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즉, 문제는 방송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동시에 독립적인 방송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북저널리즘에서 펴낸 <KBS 죽이기>의 저자들은 공영방송에 대한 논의를 더 넓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사회와 사장 선임 방식에 국한되지 않고, 공영방송의 목표는 무엇인지, 이를 고려할 때 시청자는 의무와 권한을 어떻게 행사해야 할지 등을 다루며 포괄적인 ‘공영방송 거버넌스’를 논해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 더 유리한가’만 따지면 공영방송 지배구조 논의는 정파적 갈등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사장 임명부터 수신료 징수까지, 공영방송을 둘러싼 논란은 ‘공영방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며 맞닥뜨리는 것들입니다. 여야가 바뀔 때마다 공수만 교대하고, 개편의 필요성과 방향성은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 행태가 계속된다면 공영방송에 대한 우리의 불신은 커집니다. 그리고 불신이 공영방송이 겪는 문제를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고리를 만든 것도, 끊을 수 있는 것도 결국 정치입니다.
참고자료
[단행본]
정영주·오형일·홍종윤(2023). KBS 죽이기. 북저널리즘
[논문]
김민정(2017).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 확보를 위한 입법 과제 고찰: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법을 중심으로. 입법과 정책 제9권 제2호. 국회입법조사처.
최선욱(2021). 공영방송 이사와 사장 임명의 제도변화와 정치적 취약성. 언론정보연구 58권 4호.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최진응. (2014). 정치체제의 변화와 방송제도개편: 1987년 민주화와 한국방송제도의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행정연구, 23(1), 161-180.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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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원. 왜 민주당은 여당 때 방송법을 개정하지 않았나? 한겨레21. 2023. 09. 04. https://n.news.naver.com/article/036/0000048687?sid=102. 2023. 10. 22. 접속
김달아. 정권 바뀔 때마다 KBS 사장 수난사. 한국기자협회. 2023. 09. 06. http://m.journalist.or.kr/m/m_article.html?no=54253. 2023. 10. 23.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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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운. 공영방송 이사 국민추천제, 여야 입장차 다시 확인. 미디어오늘. 2021. 12. 21.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1323&page=10&total=701. 2023. 10. 22. 접속
정철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돌고 돌아 독일식까지 왔다. 미디어오늘. 2022. 04. 15.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3528&page=8&total=701. 2023. 10. 22. 접속
정철운. “또 미뤄진 공영방송 독립 위한 의회 책무, 이런 광경 몇년째냐” 미디어오늘. 2023. 09. 25.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2716. 2023. 10. 22. 접속
조현호. 엄기영 사장 사퇴 압박, 방문진 내부 비판도 거세. 미디어오늘. 2009. 09. 03.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647. 2023. 10. 23. 접속
차형석. 이명박근혜 정부의 5단계 ‘방송 장악 잔혹사’. 시사IN. 2017. 09. 0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021. 2023. 10. 23. 접속
최성진.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지금이라도 머리 맞댈 때다. 한겨레. 2022. 05. 18.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1043288.html. 2023. 10. 23. 접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