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에게 겨울이 왔을까
모두가 ‘한국 영화의 위기’를 말하는 와중에 보란 듯이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있습니다. 44년 전 오늘, 전두환이 집권한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서울의 봄’입니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분노했습니다. 관람 중 최대 심박수를 체크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인증하는 ‘서울의 봄’ 챌린지가 유행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운데요.
우리가 ‘서울의 봄’을 보고 이토록 분노하는 것은 이후 전두환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은 90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하기까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대해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회고록에서 역사를 왜곡하며 책임을 회피하기만 했죠.
‘서울의 봄’의 엔딩은 12.12 군사반란의 결과와 그 주동자들의 성공을 전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계속해서 달려갔습니다. 전두환의 시대가 저물고, 김영삼 정부는 시대의 상처를 봉합해야 하는 수술대에 섰습니다. 수술 결과는 무기징역 선고, 그리고 사면이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오늘날 극장가에 넘실대는 분노가 그 후유증이라고 말합니다. 한편 다른 한 쪽에서는 우리 사회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근본적 정치 탐구>에서는 ‘서울의 봄’ 이후, 5공화국 청산 과정과 그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제5공화국: 1981년에서 1987년까지 지속된 전두환의 군사정권 시대
민주화에서 특별사면까지
노태우 정권
1987년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군사정권이 실제로 마침표를 찍기까지는 5년이 더 걸렸습니다.
6월 항쟁이 갈수록 거세지자,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6.29 특별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했습니다. 민주화 세력 내에선 12.12 군사반란의 핵심 인물인 노태우의 반성 없는 민주화 선언을 받아들여야 할 지를 두고 논쟁이 일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은 것도 의심스럽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민주화가 절박했던 시민들은 결국 6.29 특별선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우려는 현실이 됐습니다. 민주화 후 첫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된 겁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전 정권과의 차별화를 위해 5공화국 청산을 내걸었지만 5공 인사를 정리하는 소극적인 차원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1988년 총선에서 야당이 여당을 크게 이기며 진전이 있었습니다.
이후의 5공 청산은 크게 두 가지 쟁점으로 이뤄졌습니다. 5공 비리 청산과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인데요. 국회는 2개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5공 청문회와 5.18 청문회를 개최하며 과거 청산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을 포함한 친인척 10명, 5공 핵심 인사 47명이 구속됐습니다.
1️⃣ 5공 비리 청산
- 국회 5공비리 특별위원회(5공특위)는 5공화국의 비리를 분야별로 나눠 조사했습니다. 일해재단 비리, 해외재산 도피 등 44건의 비리를 1차 조사대상으로 삼았습니다.
- 일해재단은 국가 안전보장과 평화통일을 위한 정책 연구재단이었습니다.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피해자 지원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이후 확대됐습니다. 그러나 재단의 실제 목적은 전두환이 퇴임 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발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 전두환 정권은 재단 기금 조성을 위해 대기업에 비자금을 모금했습니다. 돈을 내지 않은 기업은 부실기업으로 점찍어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기금이 총 600억원에 달했습니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미얀마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을 노린 북한의 폭탄 테러 사건. 외교사절 17명이 사망했다.
2️⃣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
- 국회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위원회(광주특위)가 구성돼 책임자 처벌과 진상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 5.18 청문회의 핵심은 당시 군의 지휘 과정을 밝히고 발포명령을 내린 사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증인들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 전두환과 최규하 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하자 민주정의당은 청문회에 불참했습니다. 이로 인해 청문회가 무기한 연기됐습니다.
- 이처럼 처벌도, 진상규명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지만 5.18 민주화운동이 폭동이 아닌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됐다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1989년 12월 31일, 마지막 청문회에서야 전두환이 증인으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청문회 생중계 시청률이 81%를 기록할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는데요. 전두환은 청문회 내내 비리 개입을 부정했고, 5.18 진압에 대해서도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학살 개입을 부인하고 5.18은 폭동이라 주장했습니다.
5공 청문회에서 활약한 국회의원들은 ‘청문회 스타’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당시 초선이었던 노무현 의원이 대표적입니다. 전두환이 답변을 회피하는 모습에 분노해 명패를 던진 일명 ‘명패 사건’으로 주목받았습니다.
김영삼 정권
본격적인 5공화국 청산은 김영삼 정권에서 이뤄졌습니다. 1993년 들어선 김영삼 정부는 군사정권의 진정한 종식을 강조하고자 문민정부라는 이름을 내세웠습니다. 군인 출신이 아닌 일반 국민(문민)이 수립한 정부라는 뜻인데요.
문민정부는 그 이름에 걸맞게, 최우선 국정 과제로 일제와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는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추진했습니다.
🔨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의 독재 청산 사업
1️⃣ 하나회 척결
- 12.12 군사반란의 핵심에는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가 있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직후 속전속결로 하나회 출신 군부 인사들을 교체했습니다.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을 예고 없이 해임한 다음날, 청와대 회의에서 비서관들에게 “놀랬제?”라고 말한 것이 유명합니다.
- ‘서울의 봄’에서 그려졌듯, 12.12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전두환 좌천 계획이 새나가며 발생했습니다. 김영삼은 하나회 척결 과정에서 또 다른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최측근에게만 숙청 계획을 알렸고, 하나회 출신들을 한꺼번에 신속히 제거했습니다.
- 1년 7개월 만에 하나회는 완전히 사라졌고, 이후 군 내에서 만들어진 사조직은 적발되자마자 해체됐습니다.
2️⃣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 1993년, ‘서울의 봄’ 이태신의 모델인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12.12에 저항한 군인들과 5.18 피해자들은 반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책임자들을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12.12 관련 고소는 기소유예, 5.18관련 고소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 발언으로 반발 여론이 거세졌습니다.
- 1995년 10월, 국회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노태우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12.12와 5.18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검찰은 내란죄까지 적용해 수사를 확대했고, 노태우는 1995년 11월 구속됐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구속 수감된 첫 사례였습니다.
- 1995년 11월, 헌법재판소가 성공한 쿠데타도 형사 처벌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 1995년 12월, 5.18 특별법이 통과됐고, 검찰이 전두환을 소환했습니다. 전두환이 검찰 소환에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자 검찰은 이를 도주로 간주해 체포 및 구속했습니다.
- 1996년, 1심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 6개월을 받았으나, 2심에서 각각 무기징역, 징역 17년으로 감형됐습니다. 1997년 대법원에서 2심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3️⃣ 5·18 특별법 제정
- 노태우 정권 하의 5공 청문회에서 12.12와 5.18의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습니다. 정권 초반 김영삼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처벌은 역사에 맡기자고 밝혔지만, 처벌을 원하는 여론은 갈수록 커졌습니다. 이에 1995년 12월, 김영삼은 진정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습니다.
- 그 결과 5.18 특별법이 만들어졌습니다.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 전후로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정지하는 내용입니다. 또한 관련 범죄를 막다가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재심을 청구할 수 있게 해 피해자의 명예 회복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 국회는 5.18 특별법과 함께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했습니다. 형법상 내란, 집단 살해죄, 군형법상 반란죄 등에 대해 공소시효를 없애는 내용으로, 5.18 특별법의 위헌 소지를 없애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김영삼→김대중 정권
김영삼 대통령은 군사정권 청산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지만, 임기 내 전두환·노태우 사면을 염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사형 선고 직후부터 사면 문제를 거론했는데요. 사면 자체는 불가피하고, 여론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 시기가 달라질 거라는 예측이 나왔습니다.
결국 사면이 결단된 시기는 15대 대선 후,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로의 이행기였습니다. 정치권은 대선 기간부터 사면에 합의한 상태였습니다. 시기를 두고는 의견 차가 있었지만, 주요 후보 3명(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모두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사면의 근거는 국민통합과 경제회복이었습니다.
- 김영삼은 지역과 정파를 가리지 않는 국민통합을 이뤄 IMF 경제 위기를 이겨내야 하며, 이를 위해 두 전직 대통령 사면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추징금은 반드시 환수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김대중은 “그들이 반성하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 없다”며 정치보복을 끝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대선 직후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자는 청와대에서 만나 전두환·노태우 사면을 합의했습니다.
특별사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전두환·노태우 사면을 두고는 당시에도, 지금도 평가가 갈립니다.
✅ 긍정적 평가: 화해 사상의 실현
- 김대중 대통령은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긴 ‘최대의 피해자’였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의 시작이 당시 누명을 쓰고 체포된 김대중 석방을 주장하는 시위기도 했습니다.
- 그런 김대중이 사면을 결단하고 두 전직 대통령을 용서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사회 양극화를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 용서와 화해는 김대중의 인간적·종교적 신념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에서 사형 선고를 받을 때도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용서하며, 정치보복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려 했습니다.
- 김대중에게는 군사정권 인사들을 압박하되 보수 진영과는 연합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안착 중인 상황에서 지나친 압박으로 보수 세력을 자극하면 또 다른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 사면이 평화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배경이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국내 갈등도 봉합하지 못한 채로 북한과의 대화와 통합을 시도할 수 없기에, 김대중이 추구하는 남북 정책을 펴기 전 사면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 부정적 평가: 실패한 국민통합
- 사면에 찬성하는 정치인과 언론은 국민통합을 내세웠지만, 시민들은 그 효과를 체감하지 못했습니다. 1997년 사면 배경을 묻는 한겨레 여론 조사에서 67.9%가 '정치적 득실계산 때문'이라고 답했고, '국민화합'으로 이해한다는 사람은 26.5%에 불과했습니다 .
- ‘정치적 득실계산’이란 흔히 대구경북 표심에 대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대구경북 지역은 군사정권의 수혜지이자 전직 대통령들의 고향입니다. 실제로 당시 대구경북에서는 사면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대선 전 경향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조사에선 63.3%가 사면에 반대했지만 대구경북에선 63.1%가 사면에 찬성했습니다.
- 사면 결정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사면 이전에도, 이후에도 가해자들의 반성과 사과가 없었다는 겁니다. 전두환·노태우는 사면으로 구속 2년 만에 풀려났습니다. 반성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사과 없이 용서를 말하는 바람에 가해자들이 뻔뻔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 김대중이 피해 당사자이긴 하지만 군사정권에 희생된 피해자를 대표할 수는 없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수많은 피해자의 아픔이 치유되기도 전에 성급한 결정이 이뤄졌고, 피해자 개인들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도 않았습니다.
✅ 대안적 평가: 용서와 처벌을 함께
- 한국외대 사학과 노명환 교수는 사면의 옳고 그름을 이분법적으로 따지기보다 용서와 단죄를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사면에 정치적 계산만이 있었다는 해석은 김대중의 생애를 고려할 때 적절하지 않으며, 그러한 해석만을 확대하는 것은 정치 혐오에 기여하고 피해자가 용서의 단계로 나아갈 수 없게 합니다.
- 따라서 김대중의 용서에 진정성이 있음을 인정하되, 시민 사회도 그 정신에 공감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과거사 청산 방법을 찾아 실천해야 한다는 제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