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계란 흰자’ 같은 경기도?

《팝콘폴리틱스》
영화나 드라마에 나타난 정치적 배경을 ‘덕력’ 넘치는 시각으로 파헤쳐보는 콘텐츠입니다. 팝콘 한 봉지 뜯으면서, 아니면 맥주 한 캔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정치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경기도는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같아”

“날 추앙해요” 라는 대사로 잘 알려진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주인공 가족 삼남매는 매일같이 꾸역꾸역 지하철을 타고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한다. 아, 지하철이 아니라 전철이다. “경기도는 지하로 안 다녀서. 뭐하러 힘들게 땅을 파, 노는 게 땅인데.” 삼남매 중 첫째인 기정이 말한 것처럼, 주인공 남매가 통근할 때 타는 4호선은 범계역을 지나면 종점 오이도역까지 지상 구간이다.

“어떻게 청춘이 맨날 집에 가기 바빠” 경기도민들이라면 쓴웃음을 짓게 되는 대사다. 경기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임에 나갔다가 “먼저 일어나 볼게요” 하며 자리를 뜬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한창 재밌게 노는데 먼저 빠지려니 아쉽기도 하고, 다들 이해는 해 주지만 사람들 눈치도 보인다. 먼저 집에 가려니 짜증도 나지만, 막차 놓쳐서 택시비로 몇 만 원 깨지는 것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그나마 분당, 일산, 안양, 과천 같은 동네면 서울과 가까우니 좀 낫다. 광주나 수원, 남양주까지 가면 좀 많이 피곤해진다. 화성이나 평택, 파주나 동두천이면 진작 자리를 떠야 한다. 집에만 빨리 가야하는 게 아니라 다음 날 아침 서울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더 빨리 출근해야 한다. 오죽하면 “경기도 살면 인생의 20%를 지하철에서 보내게 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을까.

해방일지의 주인공 삼남매는 경기도 산포시에 살고 있는데, 산포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동네다. 드라마를 본 팬들은 ‘산포’라는 지명이 ‘산본+군포’가 아니겠냐는 추측을 내놨다. 농촌으로 묘사되는 산포와 달리 산본 신도시에는 아파트가 빽빽하다. 해방일지의 촬영은 경기 북부의 연천에서 이뤄졌다. 주인공들이 전철을 타는 ‘당미역’은 천안에 있는 1호선 성환역이다.

물론 전철로 서울 출퇴근이 가능한 지역 중 산포 같은 동네는 많다. 당장 사당역에서 전철 4호선으로 35분 정도 걸리는 군포 대야미역 주변에도 농지가 많다. 화성시나 안산시, 시흥시에서도 농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경기도가 도시와 교외의 중간지대이기에 나타나는 풍경이다.

©JTBC

경기도의 ‘흰자’ 역사는 짧지 않다. 애초에 ‘경기(京畿)’라는 말은 동양에서 ‘왕이 사는 서울과 그 주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비슷하게 일본에서도 옛 수도인 교토 주변의 간사이 지방을 ‘긴키(近畿, 근기)’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에도 경기라는 지명이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의 경기도가 만들어진 건 조선이 건국되면서다.

경기도는 조선의 수도 한성의 경제적 배후지인 동시에 군사적 방어를 담당하는 지역으로 만들어졌다. 조선 초에는 정부가 관리들에게 직접 봉급을 주는 대신 농지에서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줬는데, 이들이 세금을 걷을 수 있는 땅이 경기도에 있었다.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남한산성과 행주산성 등의 군사시설도 경기도에 있었다. 실제로 두 시설은 각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즉, 쉽게 말해 경기도는 처음부터 서울을 떠받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개념은 지금도 제법 유효하다. 서울의 천만 인구를 분담하기 위해 90년대 들어 고양, 군포, 부천, 성남, 안양 지역에 1기 신도시가 만들어졌고, 이후 2기, 3기 신도시 사업이 진행되면서 더 많은 신도시가 만들어졌다. 경기 북부에는 곳곳에 군사 시설, 대전차 방어물, 엄폐물 등이 설치돼 있다. 유사시 휴전선에서 5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서다. 경제적 배후지이지 군사적 방어지대로서 경기도의 속성은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나의 해방일지” 등장인물들은 서로에게 자조하듯 말한다. “경기도는 흰자 같대.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1,300만 명이 몰려 있는 흰자

2022년 경기도의 인구는 1,395만 명에 달한다. 대한민국 총 인구가 5,100만 명이 조금 넘으니, 인구의 1/4 이상이 경기도에 살고 있다. 1970년 344만 명이었던 경기도 인구는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1990년 615만 명까지 증가했는데, 그 이후 30년 사이에 2배 넘게 증가한 것이다.

경기도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앞서 설명했듯 서울의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위성도시와 신도시를 대거 건설하면서 이뤄졌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타 지방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서울로 대거 이주했고, 이들이 살 주택이 부족했기에 서울 곳곳에 달동네와 판자촌 같은 열악한 주거시설이 만들어졌다. 당시 정부와 서울시는 판잣집이나 천막 같은 무허가 주택 문제와 주거난을 해소하기 위해 시민아파트를 공급하는 한편, 무허가 주택 주민들을 서울 외곽 지역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들을 정착시킨 지역이 당시 경기도 광주군, 지금의 성남시에 위치했던 ‘광주대단지’였다. 서울에서 광주로 이주시킨 인구는 10만 명에 달했지만, 이주민들이 도착한 광주대단지는 허허벌판이었다. 서울시와 정부는 이들을 이주시키면서 아무런 기반을 갖추지 않았다.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일터조차 없었다. 돈을 벌려면 서울로 가야 했지만 교통편도 마땅치 않았다. 많은 주민들이 금만 그어 놓은 땅 위에 천막이나 판잣집을 지어 놓고 살아야 했다. 열악한 생활환경 탓에 ‘굶주린 산모가 아기를 삶아먹었다’는 말까지 떠돌았다.

결국 1971년 8월, 불만이 폭발한 주민들은 관공서와 경찰서 등을 점거하고 대규모 항쟁에 돌입했다. 서울시장과 정부의 사과 및 빈민 구제 약속으로 항쟁은 마무리됐지만, 정부는 시위에 참여한 주민 22명을 형사처벌했다. 한동안 광주대단지사건은 ‘폭동’이자 ‘난동’으로 기억됐다. 오늘날 성남시는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8.10 성남민권운동”이라고 칭한다. 당시 광주대단지 주민들의 삶을 묘사한 작품이 조세희 작가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어쨌거나 도시 확장과 강남 개발의 결과로 서울 인구는 1988년 천만 명을 돌파한다. 폭증한 인구 탓에 주택 수요가 늘어나고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하자, 노태우 정부는 ‘주택 200만 호 건설’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주택 공급에 나섰다. 집값 문제를 잡는 데 모든 정권이 목숨을 걸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 1기 신도시 사업을 진행한다. 1기 신도시 주민 입주와 서울로부터의 인구 유입에 힘입어 1990년 600만 명이던 경기도 인구는 2000년도에 900만 명을 넘긴다. 같은 기간 한국의 인구는 약 413만 명(4,287만 > 4,700만) 정도 늘었는데, 그중 70% 이상을 경기도가 흡수한 것이다.

1기 신도시로도 인구 수용이 어려워지자 노무현 정부는 2003년 2기 신도시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에 연접한 도시에 조성된 1기와 달리 2기는 화성, 평택, 파주 등 서울에서 먼 지역에도 만들어졌다. 2기 신도시에서 공급된 주택은 60만 호에 달했다. 2003년 경기도 인구는 서울 인구를 추월했고, 2018년에는 1,300만 명을 돌파한다.

집에 가기 바쁜 경기도 청춘들의 비극도 여기서 시작됐다. 집은 많이 지어놨지만 일자리와 대학은 여전히 서울에 있으니 매일 같이 서울로 출퇴근하고 통학해야 한다. 최근 들어 판교테크노밸리가 조성되는 등 경기도 내 산업, 경제 기반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경기도민들이 ‘노른자땅’ 서울로 출퇴근하기 위해 전철에 몸을 싣고 있다.

‘해방’을 꿈꾸는 비수도권

만약 경기도 사람들이 서울까지 가지 않고도 경기도 안에서 괜찮은 일자리를 구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매일같이 지옥철에 몸을 우겨넣을 필요도 없고, ‘빨간 버스(광역버스)’ 한 대를 놓쳐 지각할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JTBC

사실 그 전에 서울과 수도권에 이렇게 많은 인구가 몰리지 않았으면 됐다. 타 지방 인구가 지방 도시권에 머무를 수 있었으면 서울 인구 역시 덜 과밀해졌을 것이고, 경기도 인구 역시 적정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2021년 기준 서울, 경기, 인천을 합친 수도권에 거주하는 인구는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2,600만 명이다. 인구수 2위 권역인 동남권(부산, 울산, 경남)에 거주하는 인구가 780만 명 정도니, 무려 3배에 달한다. 2020년 매출액 상위 1,000개 기업 중 본사가 수도권인 회사가 743곳이다. 사람도, 좋은 일자리도 전부 수도권에 몰려있다.

‘서울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지역 불균형 문제는 하루이틀의 문제도 아닌 만큼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역대 정권들도 그래서 지방의 균형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도했다. 공기업과 공공기관 지방 이전과 혁신도시 조성, 세종시 건설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광역경제권”이나 “지역행복생활권” 같은 캐치프레이즈도 마찬가지다. 잘 됐느냐고? 아직까지 눈에 띄는 효과는 없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 같다. 지방에 사람을 모으기 위해 뭔가 만들려고는 하는데, 사람이 없으니 만들지 못하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중앙 정부 사업으로 대규모 사업을 벌이려고 하면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거치게 된다. 총 사업비가 500억 이상이고 국가 재정이 300억 이상 투입되면 예타 대상이다. 비수도권 지역은 인구밀도가 비교적 낮은데, 인구가 적으면 예타 경제성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힘들다. 때문에 2019년 비수도권 대상 예타에서 경제성 점수 비중을 낮췄지만, 비수도권이 예타를 통과하기 어려운 것은 여전하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들은 각종 사업을 추진하면서 사업의 특수성을 이유로 정부에 예타 면제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예타를 거치지 않고 사업 추진을 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재정 지출을 줄이기 위해 예타 면제 조건을 구체화하고 면제를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문재인 정부에서 예타 면제가 지나치게 자주 이뤄져 재정 운용이 방만해졌다는 이유에서다. 엄격한 잣대로 나라 재정을 알뜰하게 운용하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걱정하는 시선도 많다. 경제 규모도 인구도 부족한 비수도권은 예타 면제가 축소되면 앞으로 각종 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균형발전에 빨간불이 켜지는 조건이다. 균형발전도 중요하고, 재정 낭비 방지도 중요한 일인데 그 사이에서 가치판단의 기준을 세우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지방에 신공항을 짓거나, 새 철도를 놓으려고 할 때마다 정치적 논쟁이 발생하는 이유다.

이렇게 보면 타 지역에 비해 인구밀도가 높은 수도권은 상대적으로 수혜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경기도 안에서도 불균형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및 첨단산업단지 유치를 통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경기 남부 지역에 비해 경기 북부 지역은 인구와 산업 모든 측면에서 낙후돼있다. 하지만 같은 경기도에 속해있기 때문에 수도권 지역에 대한 각종 규제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발전이 필요한 경기 북부에도 제동이 걸리는 것이다.

이런 문제로 경기도를 북도와 남도로 분할해야한다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제기돼왔다. 역대 도지사들은 대체로 분도론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올해 취임한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경기 북부 특별자치도’ 설치를 주장하고 있다. 경기 북부 정치인들도 이에 호응하는 상황이다. 실현된다면 경기도 설치 이후 600년 만에 행정구역이 쪼개진다. 하지만 분도를 한다 해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경기 북부 시군들은 재정자립도가 매우 낮다. 분할로 경기 남부의 수익에 기댈 수 없게 되면, 경기 북부는 전에 없던 재정적 문제에 시달릴 수 있다.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와 경기도 분도론을 비롯한 각종 균형발전 정책에 명확한 정답은 없다. 가치를 배분하는 문제인 동시에 국가 재정이라는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과 갈등을 조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은 기업을 경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목표는 효율 이상의 정치를 추구할 때 이룰 수 있는 게 아닐까.

글: 에디터 이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