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와 미궁이 말해준 것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애증의 정치클럽 🍂건조 에디터입니다.
꽃놀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봄을 보냈습니다. 계절감을 만끽하기 위해 1년을 살아가는 저에겐 애석한 일입니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벚꽃을 볼 수 있는 봄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언론사에서 일하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치는 유독 시간의 흐름이 빠른 분야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이벤트가 발생해 이슈의 지속기간이 짧다고요. 인물이든 사건이든 진득하게 바라볼 여유가 부족하다고 아쉬워합니다. 봄의 벚꽃처럼, 특정 시기에만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분명 있을텐데 말이죠.
그만큼 동료를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말 그대로 쏟아지는 이슈를 처리하다 보면 옆 사람의 얼굴을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정치만큼 동료의 역할이 중요한 분야도 없지만요.
시간과 관계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니, 최근 재미있게 본 애니메이션 두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장송의 프리렌>과 <던전밥>입니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구독자분들께선 이런 의견을 보내주셨습니다.
[에디터노트] 경로를 재탐색 중입니다 (4/26)
- 오랜만에 뉴스레터를 정독했습니다. 에디터님께서 고민을 진솔하게 털어놓아 주신 것이 오히려 정치에 대한 제 태도와 관점에 관해서도 질문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summer 님)
- 두 번째 과제로 마음에 담아주셔서 감사해요 :) 언젠가 풀어주실 이야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초딩 님)
[여의도 밖 정치] 어필 정신영 대표: 난민은 테러리스트도 노예도 아니다 (23/12/15)
- "내가 믿는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할수록 다른 사람을 쉽게 수단으로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일을 배우지 않았어요."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 문장을 보고 말씀해주신 내용에 진실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구글폼을 바로 열었죠. 저는 노동운동을 한다는 교수님들이 막상 관련 단체의 행사를 위해 대학생들을 동원하는 거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자발적이었지만 막상 가보니 내가 무슨 활동을 하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죠. 그냥 봉사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무급 행사장 서빙 알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 뒤로 그 교수님의 활동은 아무리 훌륭하다 온 세상이 칭송해도 안 믿거든요.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부터 돌봐주시는 것도 잊지 않는 분을 인터뷰 콘텐츠를 통해 만난 것 같아 너무 기뻤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렇기에 서로를 위한 응원을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고맙습니다. (Skylight 님)
애정클 콘텐츠에 대한 다양한 의견 제시는 늘 환영입니다! 피드백창을 통해 의견을 남겨주시면, 다음 에디터 노트에서 논의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편하게 찾아주세요!
*보내주신 의견은 에디터의 편집을 거쳐 소개됨을 알려드립니다. 내용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가독성을 위한 편집만 진행하고 있습니다.
<장송의 프리렌>과 <던전밥> 모두 중세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엘프와 드워프, 마법, 마물이 존재하는 세계죠. <장송의 프리렌>은 마왕을 물리친 용사 일행이 모험에서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주인공 프리렌은 영겁에 가까운 삶을 사는 엘프고, 강력한 마법사입니다. 모험이 끝나고, 프리렌이 잠시 여행을 다녀온 사이에 힘멜은 삶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노인이 됐습니다. 프리렌은 힘멜이 죽고 나서야 그가 자신의 삶에 남긴 흔적을 발견해 나갑니다.
힘멜은 마왕을 무찌르러 가는 험난한 모험에서도 자질구레한 기쁨과 슬픔을 만끽하는데 시간을 쏟았습니다. 미궁의 모든 길을 탐색해보고, 지나가던 마을에서 부탁한 잔심부름도 지나치지 않았죠. 프리렌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프리렌에게 중요한 것은 마왕을 쓰러트린다는 과업이고, 이외의 일은 그에게 주어진 긴 시간 중 언젠가 느긋하게 하면 될 일입니다. 프리렌은 인간이 자신과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힘멜의 삶에서 핵심은 관계입니다. 그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번거로움을 자처합니다. 또렷이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노인 힘멜은 모험의 즐거웠던 순간들을 회상하며 눈을 감습니다. 작품에 따르면, 인간은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선택을 미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힘주어 생각하고, 빠르게 변하죠. 힘멜의 선택은 지금을 선명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힘멜의 선택은 나아가 프리렌을 변화시켰습니다. 프리렌은 새로운 모험에서 힘멜의 선택을 따라가며 인간을 알게 됩니다. 힘멜의 용기와 다정함이 그와 관계 맺은 사람들을 통해 전승되었음을 확인합니다. 관계는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을 더듬으며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간다면 이별 뒤에도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것이 <장송의 프리렌>이 전하는 메세지입니다.
<던전밥>이 전면에 내세우는 주제는 욕망입니다. 인간은 다양한 욕망을 가지지만, 생물이기에 기본적으로 가지는 욕망이 가장 앞섭니다. 식욕, 수면욕 같은 것이요. 이 기본 욕구가 생물의 행동원리를 형성합니다. 미궁의 마물도, 마물을 물리치는 모험가도 여기에 묶여있습니다. 미궁은 하나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고, 이곳에 들어온 모험가들도 그 일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식량 없이 미궁을 탐험할 수 없죠.
주인공인 라이오스 일행은 미궁을 토벌 대상으로만 여기는 다른 모험가들과 달리, 미궁 내 마물로 식사를 해결하며 그들의 생태를 파악합니다. 마물 사냥의 방법도 그 지식에서 나오죠.
‘먹는다’는 행위는 미궁의 먹이사슬에서 살아남았기에 할 수 있는 행위이고, 먹이사슬의 일부로서 미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태계를 존중해야 합니다. 한도 이상의 욕망이 미궁에 몰리면 재앙이 일어납니다. 라이오스 일행은 생물의 기본 욕구라는 원리에 기반해 자기 자신과 마물을 대합니다. 누구나 균형 잡힌 식사, 적당한 운동, 충분한 수면이 필요합니다. 나를 구성하는 원리와 상대를 구성하는 원리, 그 사이 공통점이 세계를 굴리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관계를 다룬다는 겁니다. <장송의 프리렌>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던전밥>은 사람과 생태계의 관계를 주제삼죠. 나를 구성하는 세계와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극적인 이야기일수록 인기를 끄는 시대에, 두 만화의 다정하고 차분한 통찰은 제게 깊은 위로를 주었습니다.
프리렌이 바라본 인간의 세계 안에서도 가장 빠르게 바뀌는 곳이 정치입니다. 모두가 앞만 보고 분주하게 달리는 이곳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나 관계가 남긴 흔적을 곱씹을 시간을 얻기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 문제도, 사람과 생태계 사이의 문제도 다음주면 지나갈 ‘이슈’ 정도가 되어버리죠. 재난도, 돌봄도, 누군가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언제나, 나와 세계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선거의 열기가 가시고 새로운 국회가 들어서기까지의 한 달은 정치권의 비공식적 휴가 시즌이라고 하더군요. 이슈와 이슈 사이를 천천히 걸어보는 한 달이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