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머그샷? 오히려 좋아"
트럼프 전 대통령이 현지 시각으로 지난 24일,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 구치소에 자진 출석해 일시적으로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는 20분 만에 보석금 약 2억 6천만원을 내고 풀려났는데요. 이때 찍은 머그샷(Mugshot: 경찰에 체포된 범인을 식별하기 위해 찍는 사진)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입니다.
트럼프의 머그샷은 역사상 최초의 미국 대통령 머그샷입니다. 트럼프는 이미 3번의 기소를 당했지만, 머그샷을 찍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소가 이뤄진 조지아주의 형법은 중범죄 혐의로 기소된 모든 이들의 지문 채취와 머그샷 촬영을 요구합니다. 전직 대통령에게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대통령 후보급의 정치인이 머그샷을 찍을 정도의 중범죄로 기소되면, 정치 인생이 끝났다고 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모든 상식과 관행을 초월하는 인물입니다.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최고의 마케팅을 펼치는 중입니다.
트럼프의 처칠 벤치마킹
트럼프는 머그샷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치밀하게 계산된 포즈일 거라고 예측합니다. 존 볼턴 전 국가안보 보좌관은 검사들과 판사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라고 해석했는데, 사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전부터 찡그리며 노려보는 표정을 선호해 왔습니다. 임기 초 백악관 공식 사진에서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때 자신이 ‘처칠 같지 않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미국 의사당 난입 사건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의 트위터 계정은 정지당했습니다. 이후 트루스 소셜이라는 본인의 대안 플랫폼을 통해 지지자들과 소통을 해왔습니다. 작년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한 후 트럼프의 계정이 복구됐지만, 트럼프는 트위터를 다시 사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머그샷을 찍은 지 약 3시간 만에 첫 트윗을 남겼습니다. 사진 아래에는 대문자로 이렇게 썼습니다. “Election Interference (대선 개입), Never Surrender! (절대 항복하지 말아라), donaldjtrump.com”. Never Surrender는 2차 대전 중 처칠의 연설로 유명한 문구인데요. 영국이 포기하지 않고 싸웠듯, 자신을 부당하게 탄압하는 권력에 맞서겠다는 메시지입니다.
트럼프는 본인의 캠페인 웹사이트 상점을 통해 머그샷을 이용한 굿즈를 팔았습니다. 머그샷을 박은 머그잔, 티셔츠, 포스터, 자동차 범퍼 스티커 등을 판매했습니다. 8월 한 달간 트럼프 캠페인은 약 264억원 이상의 후원금을 거둬들였는데, 그 중 절반인 약 124억원이 머그샷 이후 모금된 액수라고 합니다.
이처럼 트럼프 캠프는 ‘정치탄압’ 메시지를 앞세우며 기소 될 때마다 지지층 결집을 도모했습니다. 미국의 보수 논객인 벤 샤피로는 “머그샷이 트럼프 캠페인에 있어 최고의 날을 만들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트럼프의 혐의
현재 트럼프 전 대통령은 4건의 형사 사건으로 재판 중이며, 총 91가지의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두 건은 연방 정부 차원에서, 다른 두 건은 주 정부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모든 사건에서 무죄를 주장합니다.
첫 번째 사건은 일명 ‘Hush Money Case’, 성추문 입막음의 대가로 돈을 지불한 건입니다. 올해 3월 30일 뉴욕주에서 기소됐습니다. 지난 2016년 대선 막바지에 포르노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와의 섹스 스캔들이 불거졌는데, 이에 대한 입막음의 조건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변호사인 마이클 코헨이 대니얼스에게 13만 달러를 지불하며 서류를 조작했다는 혐의입니다. 검찰 측은 트럼프가 대통령 당선 후 이 금액을 본인의 기업을 통해 코헨 변호사에게 상환했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트럼프 측은 이는 정당한 변호사 비용이라고 밝혔습니다. 서류 조작 자체는 경범죄에 해당하지만, 조작이 또 다른 범죄로 이어질 경우 중범죄로 취급합니다. 맨해튼 검찰은 트럼프의 서류 조작이 중범죄에 해당한다고 보고 34가지의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다음은 기밀문서 유출에 관련된 연방 사건입니다. 연방 대배심원에 의해 6월 초에 기소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퇴임 후 기밀문서를 무단으로 옮겨 본인의 자택으로 가지고 갔으며,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일반인에게 1급 기밀문서를 보여줬다는 혐의입니다. 이 사건은 2022년 초부터 조사됐는데, 트럼프 측 변호인은 2022년 6월에 모든 기밀문서를 반납했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두 달 뒤 FBI의 압수수색 결과 102건의 기밀문서가 발견됐습니다. 이 사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총 40개의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정말 심각한 것은 나머지 두 건의 기소입니다. 세 번째 기소는 2021년 1월 6일 의회 난입으로 이어진 ‘대선 결과 전복 모의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연방 사건으로, 8월 1일 대배심원에 의해 기소됐습니다. 조 바이든 당선을 뒤집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이 측근들과 공모해 2020년 대선에 대한 거짓 정보를 퍼뜨렸다는 혐의, 바이든이 이긴 주의 공화당원들을 압박하거나 가짜 선거인단을 꾸리고, 마이크 펜스 부통령에게 대선 결과를 무효화하라고 압박한 혐의 등입니다. 총 4개의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인 8월 14일, ‘조지아 선거 개입 사건’으로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의 패니 윌리스 검사장에 의해 기소되었습니다. 조지아주는 앞선 ‘대선 결과 전복 모의’가 가장 활발했던 곳인데요. 96년 대선부터 줄곧 공화당 대선 후보가 이겨왔던 주입니다. 주지사도 2003년부터 쭉 공화당원이었고요. 하지만 2020년 대선에선 바이든이 역사적 승리를 거뒀습니다. 트럼프와의 격차는 불과 0.23%, 11,779표 차이였습니다. 워낙 근소한 차이였기에 재검표도 여러 번 거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트럼프 측은 온갖 공세를 펼쳤습니다. 의도적으로 편집된 개표 영상을 공개하며 이중 개표, 용지 바꿔치기 등의 주장을 펼쳤고 거짓 선거인단을 꾸려 선거 결과를 바꾸려 했습니다. 2021년 1월엔 브래드 래펜스퍼거 주무장관과 통화하며 사라진 표를 찾아오라며 한 시간가량 다그치는 녹취가 공개돼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논란이 된 발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이거 하나야. 나는 그냥 11,780표를 찾고 싶을 뿐이야. 우리가 실제 가진 표에 딱 한 표가 더해진 숫자지. 왜냐하면 조지아주에서 이긴 건 우리거든.”
윌리스 검사장은 2021년 2월부터 트럼프 대통령 조사에 들어갔고, ‘RICO’라는 조직범죄법의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미드 ‘베터 콜 사울’을 본 사람에겐 익숙한 용어겠습니다. ‘RICO’는 본래 마피아 같은 조직범죄를 소탕하고자 만든 법입니다. 현재는 복잡한 금융사기, 뇌물수수, 사이버범죄 등을 광범위하게 규제하는 법안으로 확장됐습니다. 윌리스 검사장은 이를 적용해 트럼프와 측근들을 무더기로 기소해 총 42건의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이 중 트럼프 대통령에게 적용되는 혐의는 13개입니다.
막간의 질문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토록 수많은 혐의로 기소된 트럼프가 내년 대선을 완주할 수 있을지 우려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감옥에 가도 대통령 출마는 이론적으로 가능합니다. 실제로 1920년, 미국 사회당의 유진 데브스 후보가 옥중 대선 출마하여 100만 표를 얻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사면권이 생기기 때문에, 트럼프가 재선 후 자신이 임명한 법무장관을 통해 기소들을 취하할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문제는 대통령 사면은 연방 사건에만 적용된다는 겁니다. 조지아주 기소는 주 관할이기에 주 위원회에서 사면을 결정합니다. 또한 조지아 법에 의하면 주 위원회의 사면 신청도 수감 후 5년 이후부터 가능합니다. 복잡한 경우의 수에 미국의 유권자들과 법 전문가들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합니다.
각계의 복잡한 반응
심경이 복잡하기는 민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첫 기소 당시 민주당의 분위기를 악시오스는 이렇게 전합니다. “트럼프의 기소는 민주당 의원들에게 환호만큼의 긴장감을 주고 있다. 행여나 폭발적인 형사 사건에 산소를 더하는 꼴이 되어 트럼프와 그의 공화당 동료들을 더욱 키워줄 가능성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 또한 트럼프의 기소에 대한 질문에 ‘노코멘트’했고, 지금까지도 침묵을 지켜왔습니다. 이번 트럼프 머그샷에 대한 질문에도 트럼프가 ‘핸섬 가이’라고 농담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폴리티코에서 내년 경합지역에서 선거를 치르게 되는 6명의 민주당, 1명의 무소속 상원의원에게 세 번째 트럼프 기소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수 언론은 바이든 정부의 ‘정의의 이중잣대’를 비판하며 ‘내로남불’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폭스 뉴스의 앵커 션 해니티는 ‘민주당은 지난 20년간 본인들이 질 때마다 선거 결과를 부정해 오지 않았느냐’면서 그때 문제 제기한 의원들은 왜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냐고 반문했습니다.
민주당의 걱정처럼 공화당 진영에서 거센 공세를 이어 나가고 있는데, 기소가 위기의 트럼프를 구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모두가 민주당이 불리하리라 예측했던 2022년 중간선거에서, 트럼프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선전했습니다. 하원에서 예상보다 적은 수를 잃었고, 상원에서는 오히려 자리를 더 얻어 다수당이 됐습니다. 공화당 여론 조사 요원인 크리스틴 솔티스 앤더슨은 “그때 공화당 지지자들의 변화의 기미가 포착됐다”고 말합니다. 공화당은 트럼프의 대안을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 공화당 대선 후보 지지도에서도 트럼프와 디샌티스가 동률을 이루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올해 봄 첫 기소 이후 트럼프는 입지 회복을 넘어 확장에 성공했습니다. 지난 29일 기준으로 공화당 후보 선호도에 있어 트럼프는 여러 기관 평균 49.9%로 압도적 1위이며, 2위를 기록하고 있는 론 디샌티스 주지사와 무려 35.3% 차이가 납니다. 머그샷 촬영 하루 전, 트럼프는 공화당 경선 후보들 간의 첫 토론에 불참하며 “대중은 이미 내가 누구이고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알기 때문에 굳이 안 나가겠다”고 밝혔으며, 대신 토론과 동시간대 방영되는 인터뷰에 출연하는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공화당 지지층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마냥 편한 마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트럼프 기소로 인해 강성 지지층과 중도 지지층이 갈라지는 모양새입니다. 트럼프를 리스크로 보는 공화당원과 순교자로 보는 공화당원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미국의 CBS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MAGA 공화당원, 즉 열성 트럼프 지지층과 비-MAGA 공화당원을 나눠 트럼프 기소에 대해 물어본 결과, ‘기소는 트럼프 캠페인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이다’라는 전제에 91%의 MAGA 공화당원, 그리고 83%의 비-MAGA 공화당원이 동의했습니다. 한편 ‘트럼프에 대한 기소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라는 표현에 대해선 MAGA 공화당원 77%가 동의한 반면, 비-MAGA 공화당원은 42%만이 동의했습니다.
이는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 밀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트럼프는 최근 “나에 대한 공격은 사실 당신에 대한 공격이다. 그들이 내 자유를 빼앗을지언정 당신의 자유를 빼앗지 못하게 싸우겠다”고 연설했습니다.
즉, 공화당 지지층은 대체로 바이든 정부에 대한 증오를 공유하지만, 트럼프 개인에 대한 신뢰도에는 온도 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네바다주의 공화당 위원장을 지낸 에이미 타르카니안은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에 대한 기소에는 분명 (민주당의) 정치적인 동기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나를 포함한 많은 공화당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을 둘러싼 혼돈과 서커스, 그가 펼치는 행동에 매우 지쳤다”고 밝혔습니다. 또 다른 공화당원은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이미 세 번째 기소 때 대선 경선에서 실격당했어야 마땅하며, 그의 입방정을 극복 못하는 공화당원이 다수라고 말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과 경합하게 되면 무조건 질 것이라고 덧붙이면서요.
미국 대선까지는 1년 2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판 상황과 구속 가능성이 계속해서 지지율 결집 효과를 가져다 줄지, 혹은 공화당 안의 위기 의식을 고조시켜 다른 후보를 모색하게 할지는 더욱 두고봐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트럼프는 사업가 출신답게 일련의 위기 상황을 최고의 브랜딩과 마케팅의 기회로 활용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