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으로 기록된 한국계 용의자, Chol-Soo Lee
동양인 차별은 언제나 현재진행형
미국에서 ‘동양인 대상 혐오 범죄’가 급증했다는 소식을 기억하시나요? 미국 FBI의 2020년 통계에 따르면 아시아계 대상 혐오범죄는 전년도 대비 77% 증가했습니다. SNS 또는 뉴스를 통해 미국인이 동양인을 이유없이 구타하거나 조롱하는 영상, 혹은 한인 여성 4명이 동양인을 대상으로 벌인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가 된 소식을 접하며 체감하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사회나 특정한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은 위기 상황에 심화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비록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위기의 원흉을 지목하고 탓하는 것이 무력감을 덜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혐오는 대부분 그 사회에서 가장 힘 없는 소수자 집단에게 투영되기 마련입니다. 이는 갑자기 일어나기 보다는, 이미 형성된 차별의 토양에서 번져가곤 합니다. 1923년 일본 간토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의 혐오가 이미 차별받던 조선인에게 몰린 것처럼 말입니다.
유례 없는 재난 상황 앞에, 단지 코로나 바이러스의 진원지가 중국이라는 사실만으로 동양인은 미국 사회에서 ‘또다시’ 차별의 대상이 됐습니다. 당시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이를 부추겨 극우 진영을 결집했습니다. ‘또다시’라고 말한 것은 그간 미국 역사에 1882년 중국인 배척법, 1942년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 1992년 LA 폭동 당시 주류 사회의 한인-흑인 갈등 유도 등으로 대표되는 아시아계 차별이 존재해왔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한인, 동양인, 나아가 타 소수자들은 이러한 부당함에 맞서 연대해왔고, 이는 미국 사회의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이철수 사건’이 바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미국 사법제도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드러내고, 그 제도를 기적적으로 극복해 낸 공동체의 이야기. 그 역사를 들여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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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살인 누명
1973년 6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피해자는 중국계 갱단 간부인 입이탁(Yip Yee Tak). 그는 갱단 ‘와칭’ 소속으로, 당시 또 다른 중국계 갱단인 ‘조보이즈’와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며 살인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용의자로 지목된 이는 엉뚱하게도, 갱단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21살의 한국계 이민자 이철수였습니다.
이철수는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모범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길바닥 양아치’(street punk)라 불렀으며, 소년원에 수감된 이력이 있었고, 사건 하루 전 동료에게 빌린 총을 가지고 놀다가 방에서 실수로 실탄을 벽에 발사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총알은 입이탁 살해에 사용된 것과 종류가 같았습니다.
당시 경찰은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10여 건 이상의 중 한 건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어떻게 해서든 범인을 잡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이철수가 용의자로 붙잡혔습니다. 사건을 건너편에서 목격한 목격자 다섯 중, 두 명의 백인 목격자가 이철수를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물증도 없이 허술한 목격자 진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74년 7월, 이철수는 종신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수감 중 백인우월주의자 갱단 멤버의 공격에 정당방위하다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결국 이철수는 사형수가 됐습니다.
알아줄 사람은 ‘우리’뿐이다
이철수는 사건 당시 여자 친구와 식사 중이었다고 증언했지만, 그의 알리바이는 묵살됐습니다. 이철수의 국선변호사는 알리바이를 입증하려 들지도 않았고, 심지어 이철수를 ‘중국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 살인 용의자로 체포됐을 때의 서류에도 ‘중국인’으로 기록되었고, 교도소 당국은 한 술 더 떠서 그가 입소할 때 ‘라틴계 갱단 소속 멤버’라고 적었습니다.
미국에는 타 인종이 아시아인에게 하는 농담이 있습니다. “동양인들은 다 똑같이 생겼어.” ‘차이나타운 갱단 사건’을 다룰 때조차도 미국 사회는 한국인과 중국인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철수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 이가 있었습니다. 새크라멘토 유니온 신문사에서 일하던 이경원 기자였습니다. 이 기자는 당시 미국 주요 언론의 유일한 한국인으로, 스스로를 외톨이라고 느꼈습니다. 이 기자에게 이철수와의 조우는 오랜 친구와의 만남 같았습니다.
그는 이철수 사건을 지켜보며 수사 과정이 석연치 않음을 직감했고, 6개월 간의 탐사 끝에 78년 1월, 새크라멘토 유니언지 1면에 이 사건을 보도합니다. 이는 미국 전역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로써 이철수의 억울함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건이 알려지자 미국 한인 사회는 ‘이철수 구명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유재건 변호사를 필두로 초정예 변호인단도 꾸려졌습니다. 구명 운동을 조직했던 그레이스 킴 씨는 “한국 사람은 소수 중에 소수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났기에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이민 후 조용히 살아가던 한인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마음이 되어 구명운동에 동참했고, 운동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번져나가 한인 뿐 아니라 일본계, 중국계, 필리핀계 등 범아시아계의 연대로 확장됐습니다. 미국 사회의 소수자로 살아온 동양인들에게 이철수의 이야기가 본인의 삶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구명운동을 통해 이철수 사건은 재심에 들어갔고, 1983년 이철수는 자유의 몸이 됐습니다.
잊혀진 역사, 기억해야 하는 이유
이철수 구명운동은 미국 사회에서 범아시아계가 거의 처음으로 이뤄낸 정치적 연합이자 승리였습니다. 이는 미국 사회에 큰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이민자 학생이 100명 이상인 공립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교사를 채용하게 하는 조례가 제정됐습니다. 이철수 사건은 소수인종 관련 형사 재판 시 문화적, 인종적 감수성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판례가 됐습니다.
미국 내 아시아계를 향한 인종차별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철수 구명운동의 유산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전역의 수많은 아시안 커뮤니티가 코로나 기간 급증한 동양인 혐오 범죄에 대응했고, 2021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아시아계-태평양계(AAPI) 혐오 범죄 대응에 3년 간 약 2,200억 원의 예산을 쓰게 하는 법안이 통과됐습니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주의 2022년 아시아계 혐오범죄는 전년 대비 43% 줄어들었습니다.
현재까지 시사하는 바가 큰 사건이지만, 이철수 구명운동에 대한 기억은 갈수록 흐려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사건으로 두고 두고 회자되야 할텐데, 왜일까요?
이성민 감독은 ‘미국에서는 소수 인종에 관한 자료는 사회적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감독이 하줄리 감독과 함께 다큐멘터리 <프리 철수 리>를 제작한 이유입니다. 다큐멘터리는 이철수 구명운동에 참여했던 당사자들이 소중히 보관해온 자료들을 통해 이철수,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나아가 두 감독은 재구성된 이철수 구명활동을 통해 우리 자신과 사회를 돌아볼 것을 요청합니다. 하줄리 감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모든 사회에 다른 버전의 이철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싱글맘, 입양아, 북한이탈주민, 재소자처럼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죠. 오로지 한 인간을 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힘을 통해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이철수들은 누구인가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이 콘텐츠는 커넥트픽쳐스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